피카소의 'La Dormeuse(1932)'가 4,190만 파운드(약 646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피카소의 뮤즈 중 그의 4번째 여인인 마리 테레즈의 누워 있는 초상화인 이 작품은 1932년 그려져 1973년 그가 죽기 전까지 피카소의 개인 소장품이었는데요. 그 후 미망인인 자클린 로크가 이 작품을 물려받은 뒤, 1995년 유럽의 개인 수집가에 의해 인수되었습니다.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 외에도 수많은 뮤즈들을 거느린 여성 편력으로 유명합니다. 희대의 바람둥이이자 천재 화가였던 파블로 피카소. 그가 사랑했고 작품에 영감을 받은 뮤즈 7명을 TIKITAKA와 함께 만나봅시다.
출처-pinterest
La Dormeuse(1932) 출처- Phillips
페르낭드 올리비에 Fernande Olivier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가 파리에서 매우 가난하게 지내던 시기에 만난 동갑내기였습니다. 당시 그녀는 조각가인 남편을 둔 유부녀였는데요. 피카소를 처음 본 순간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네요. 피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그녀는 남편을 두고 8년간 피카소와 동거하게 됩니다. 당시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작업하던 중이었는데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페르낭드 올리비에의 육체를 보고 분석해 그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아비뇽의 처녀들'이 대박을 치며 형편이 나아지자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버리게 됩니다.
출처-real life elsewhere 부채를 든 여인(1908)
아비뇽의 처녀들(1907) 출처-아트인사이트
에바 구엘 Eva Gouel
에바 구엘은 당시 피카소의 친구였던 폴란드 화가 루이스 마르쿠시의 약혼녀였는데요. 피카소는 당시 작품마다 '나는 에바를 사랑해'라는 문구를 새기며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몸이 허약한 편이었고 결국 결핵에 걸리게 되는데요. 피카소는 결핵이 옮을 까봐 그녀를 떠나 혼자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피카소의 예상이 맞았던지 에바 구엘은 1915년 결핵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누드, 나는 에바를 사랑해(1912)
올가 코글로바 Olga Khokhlova
요절한 에바 구엘 다음으로 피카소가 만난 여인은 올가 코글로바입니다. 에바가 죽은 지 2년 후, 피카소는 장 콕토의 부탁으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공연의 무대 장식과 의상을 제작하게 되는데요. 당시 공연의 발레리나이자 러시아 장교의 딸인 올가 코클로바를 만나게 됩니다. 둘은 1918년 결혼해 1921년 아들 파울로도 출산하며 결혼 생활을 이어갔는데요. 곧 피카소가 다시 바람을 피우게 되어 올가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지요. 피카소는 '올가는 집착이 너무 심해서 답답하다.'라며 올가에게 이혼을 요구하는데요. 1935년 둘은 헤어지지만 올가의 반대로 이혼을 하지는 않습니다.
출처-M.Denise Costello 올가 피카소의 초상(1923)
마리 테레즈 발터 Marie Therese Walter
올가와 결혼 생활 중이던 1927년 피카소는 여고생인 마리 테레즈 발터에게 반해 6개월간 따라다닙니다. 당시 마리 테레즈는 미술에 관심이 없는 천진난만한 소녀였고 피카소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피카소의 끈질긴 구애에 그를 받아들이고 동거하게 되는데요. 당시 피카소는 46살, 올가는 17살이었다고 하네요. 마리 테레즈는 1935년 딸 마야도 출산하며 피카소에게 진심으로 빠지게 되지만 피카소는 '넌 미술을 너무 몰라. 예술적 영감을 얻을 수 없다.'라며 그녀를 떠납니다. 피카소와 헤어진 후에도 그를 잊지 못했던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죽자 저승에서 그를 돌봐야 한다며 자살합니다. 한편 그녀를 모델로 한 작품 '거울 앞의 소녀(1932)'는 지난 2013년 4150만 달러(약 451억 원),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1932)'은 1억 640만 달러(약 1210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출처-Pablo-Ruiz-Picasso.net
(왼)거울 앞의 소녀(1932) (오)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1932) 출처-M매거진
도라 마르 Dora Marr
마리 테레즈가 미술적 지식이 부족했던 탓인지 그녀를 떠난 후 피카소는 사진가이자 지식인인 도나 마르를 사랑하게 됩니다. 도라 마르는 스페인어에 유창했고 미술에 대한 이해도 깊어 피카소와 소통이 잘 되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당시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게르니카(1937)'를 작업 중이었는데, 이를 위해 유고슬라비아 출신인 도라 마르에게 자신의 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똑똑한 도라 마르도 피카소의 여성 편력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는데요. 그래서인지 피카소의 작품 속에서 그녀는 우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한편 도라 마르의 초상화인 '도나 마르의 초상화(1937)'는 9520만 달러(약 890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출처-busanlottedfs.com
(왼)도나 마르의 초상화(1937) (오)우는여자(1937)츨처-PabioPicasso.org
프랑수와즈 질로 Francoise Gilot
피카소는 60이 넘은 나이에 22세의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 그녀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하게 됩니다. 슬하에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두었으나 피카소가 프랑수와즈의 친구인 주느비에브와 바람을 피우면서 둘은 헤어지게 됩니다.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의 여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먼저 피카소를 떠난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녀는 피카소와 헤어진 후 소아마비 백신을 연구하던 세균학자 조나단 설크와 재혼하고 그녀 스스로 독립적인 미술가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한편 프랑스와즈와 헤어질 즈음 피카소가 그린 '개와 함께 있는 여인(1953)'은 피카소가 자신을 개에 빗대어 프랑수와즈에 제압당하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수와즈, 클로드와 파로마(1951) 출처-flickr.com
자클린 로크 Jacqueline Roque
프랑수와즈가 떠난 지 1년 후 피카소는 발로리스라는 남프랑스의 한 도자기 제작소에서 자클린 로크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1961년 피카소가 80살, 자클린 로크가 34살일 때 결혼하게 되는데요. 당시 큰 나이차 때문에 피카소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피카소에게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피카소에 대해 '피카소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며 나는 그런 그에 비해 늙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피카소가 죽은 뒤에는 그를 따라 권총 자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피카소는 그녀를 모델로 한 작품에서 그녀의 목을 과장해서 길게 표현했는데요. 이는 유난히 목이 짧은 그녀를 위한 피카소의 배려였다고 하네요.
출처-elparis.com
(왼)꽃을 들고 있는 자클린(1964) (오)손을 겹치고 있는 자클린(1964)출처-bosto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