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8월 허니버터칩 열풍을 기억하시나요? 호불호가 갈리기 어려운 '단짠'의 기술을 감자칩에 적용해 대박을 터뜨린 해당 제품은 일부러 생산량을 조절한다는 루머가 돌 정도로 품귀현상을 빚었는데요. 당시 대한민국 국민은 허니버터칩을 맛본 이와 그러지 못한 이로 나뉜 듯 보였습니다.
그때 허니버터칩을 공수하지 못해 아쉬움에 가득 차있던 GS25는 작은 아몬드 수입업체를 찾아 "아몬드에 허니버터맛을 입힐 순 없냐"라고 물었고 당시 빚더미에 있던 해당 업체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즉시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현재 해당 업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GS25에게 특별한 제안을 받은 업체는 바로 길림양행입니다. 중국의 길림성과 유사한 이름 때문에 중국기업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 길림양행은 사실 1982년 국내 최초로 아몬드를 수입한 '길상사'를 모태로 한 토종 한국 기업입니다. 1988년 해운회사에 다니던 윤태원 회장이 지인소개로 해당 길상사를 인수해 바꾼 이름이 길림양행이지요.
이전까지 아몬드는 국내 견과류 생산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수입금지 품목이었다가 밤 수출을 위해 쿼터 물량으로 소량 들여오게 되면서 이를 길림양행이 맡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대 아몬드 공급사인 미국 블루다이아몬드 그로워스의 한국 독점대리인 자격도 누렸고 국내 납품처도 롯데제과 등 대기업이었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아 큰돈을 버는 사업은 아니었는데요. 정해진 양의 아몬드를 컨테이너째 들여와 굽거나 그대로 납품처에 보내는 단순한 형태의 사업이었지요.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수입 규제가 풀리면서 견과류 시장의 판도는 바뀌었습니다. 롯데제과, CJ 등 대기업이 직접 나서 아몬드를 수입하고 가공하면서 대기업을 상대로 한 납품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국내 소비트렌드 역시 재래시장이 아닌 마트와 편의점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수입원과 유통망이 다양해져 설 곳을 잃은 것이지요. 결국 수입한 원재료를 직접 가공, 납품해서 전체 매출을 높이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습니다.
윤태원 회장 역시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제조회사로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다만 매출이 급감한 상황에서 제조 설비를 갖추기 위해 투자를 이어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는데요. 실제로 공장은 다 짓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음이 남발됐고 회사가 넘어가기 직전까지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윤태원 회장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더 이상의 경영이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100억 빚더미에 오른 회사를 이어받은 것은 바로 윤태원 회장의 아들 윤문현 대표입니다. 2006년 당시 윤 대표는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합격해 입사를 준비 중이던 28살 청년이었는데요. 아버지가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힘들게 꾸려온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한 것을 외면할 수 없었고 대기업 입사를 포기한 채 100억 빚과 함께 회사를 책임지게 된 것입니다.
전부터 아버지를 돕느라 회사에 나가본 적은 있지만 갓 경영학과를 졸업한 28살 청년에게 부도 위기의 회사 경영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운영비가 모자라 화장실에서 온수조차 틀기 어려운 상황에 경험이 전무한 젊은 경영자가 나서자 회사 내 유능한 인력이 빠져나가기도 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윤 대표가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곳은 PB 시장이었습니다. 이마트 등 대형 유통사가 PB 상품을 개발하면서 단가를 낮추기 중소업체와 손잡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시장을 파고든 것이지요.
덕분에 공장 가동률이 높아지면서 제조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부도 위기는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PB 제품 특성상 낮은 단가를 유지하기 위해 납품업체는 마진이 낮을 수밖에 없고 길림양행 역시 매출은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이에 훨씬 못 미쳤습니다. 게다가 견과류 단순 가공은 워낙 진입 장벽이 낮아 수많은 업체가 생겨나고 가격을 낮추는 바람에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지요.
이에 윤 대표는 견과류 가공식품 제조를 목표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이때까지만해도 국내 견과류 시장에서 가공식품의 비중은 5%에 불과했지만 윤 대표는 앞으로 국내 견과류 시장에서 가공식품의 비중이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가공 완제품을 위한 새로운 레시피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아몬드 등 견과류에 다양한 맛을 시즈닝하는 방식이지요.
개발의 기본 원칙에는 '건강컨셉을 지키겠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었고 때문에 윤 대표는 기름이 튀기는 방식 대신 기름 없이 로스팅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물론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을 개발하는 데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요. 굽기 강도와 당액 농도, 냉각 시간 등 조건을 바꾸고 또 바꿔가며 윤 대표는 개발자와 밤을 지새운 끝에 로스팅 후 겉면에 당액을 코팅해도 서로 달라붙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쉽게 눅눅해지지 않는 레시피를 개발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4년 연말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해 여름부터 시작된 해태제과 허니버터칩의 열풍이 식을 줄 모르고 이어지던 당시 GS25에서 "허니버터가 인기니 아몬드에 허니버터를 씌워보자"라고 제안해 온 것입니다. 납품기일은 2주 만에 길림양행은 GS25가 원하는 제품을 내놓았습니다. 2015년 1월 편의점과 마트에는 길림양행의 허니버터 아몬드가 출시되자마자 흥행 열풍을 맞이했습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요. 허니버터칩 열풍으로 인해 우연한 행운이 찾아온 것처럼 보이는 허니버터아몬드의 성공은 사실 이전부터 시장의 변화를 예상하고 레시피 개발에 몰두해 온 덕분에 잡을 수 있던 기회였는데요. 그렇게 탄생한 허니버터 아몬드는 출시 첫 달 2억 원어치가 팔리더니 두 달째는 10억 원, 석 달째는 20억 원으로 매출이 급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윤 대표는 해당 제품의 성공에만 머무르지 않고 제품군을 넓혀나갔습니다. 카라멜맛, 딸기맛, 망고바나나맛, 와사비맛, 쿠키앤크림맛, 티라미수맛, 김맛 등 끊임없이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해 냈지요. 특히 와사비맛은 허니버터맛과 함께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덕분에 2015년부터 시작한 수출 규모는 2018년 150억 원을 넘어섰습니다.
또 독일의 젤리회사 하리보를 롤모델로 삼는다는 윤 대표는 브랜딩을 위해 미국 판슨스디자인스쿨 졸업 후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의 MD로 근무한 백순흠 팀장을 영입했습니다. 그리고 윤 대표의 비전을 전달받은 백 팀장은 글로벌 마케팅과 트렌드를 고려해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요.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동선을 고려해 명동의 노른자 땅에 허니버터아몬드앤프렌즈(HBAF) 플래그쉽 스토어를 연 것입니다. 블루보틀 국내 1호점을 시공한 업체에서 만들었다는 이곳에는 견과류 제품뿐 아니라 HBAF 캐릭터로 제작된 다양한 굿즈 아이템까지 볼거리 즐길 거리가 다양하지요.
덕분에 2014년 650억 원에 불과했던 길림양행의 매출은 2018년 1400억 원을 돌파했고 영업이익은 11억 원에서 197억 원으로 늘어났습니다. 명동의 HBAF는 해외여행객들의 필수 코스가 되었고 롯데마트 등 대형 마트에서는 외국인에게 인기 높은 한국 간식으로 조미김보다 허니버터아몬드가 더 많이 팔리지요. 특히 일본의 한국산 넛츠 가공품 수입액은 2014년 860만 원에서 2019년 51억 원으로 불과 5년 만에 무려 582배나 늘어났습니다.
길림양행의 최종 목표는 글로벌 견과류 식품기업이라고 말하는 윤 대표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람을 꼽았습니다. 대기업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험 있는 직원을 데려와 능력을 펼치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윤 대표는 직원들에게 회사 성장에 대한 보답을 주기도 했습니다. 각 부서 팀장 9명에게 BMW를 한 대씩 선물했고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호텔에서 1박2일의 호캉스도 선물했습니다.
한편 길림양행의 아몬드 가공품이 해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미국 아몬드협회는 길림양행 측에 아몬드 재가공 공장을 미국의 아몬드 생산 공장 쪽으로 이전해 보다 효율적으로 수출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실제로 국내에서 아몬드 재배가 불가능하다 보니 길림양행은 아몬드 전량을 미국 등지에서 수입해 한국에서 재가공한 후 다시 해외로 수출하는 구조로 운영 중인데요. 만약 미국 현지 공장을 활용한다면 수입 과정을 생략해 실질적인 이득을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길림양행은 경영효율성보다 사회환원을 선택했습니다. 윤문현 대표는 회사 성장 비결에 "K푸드라는 브랜드 효과가 있었다"라며 "국민들께 고용창출과 각종 사회환원 사업으로 보답하고 싶다"라는 의지를 밝히며 미국 공장 이전 제안을 거절하고 원주기업도시에 216억 원을 들여 공장부지를 매입했습니다.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 기업가는 시장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야 한다고들 하는데요. PB 제품 납품으로 위기를 막 넘긴 시기에 완제품 제조라는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고, 허니버터아몬드로 승승장구하면서도 새로운 레시피 개발을 놓치지 않았던 윤 대표의 도전정신이야말로 시장보다 한 걸음 앞선 준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