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콘에서 잘나가던 개그맨 벌집삼겹살로 매출 200억 찍었다더니 반전 근황

소위 잘나가는 연예인들이 사업에 도전하는 모습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수천만 원에 이르는 출연료와 억 단위의 광고 계약금을 받으면서 굳이 위험성이 큰 사업에 뛰어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에 대해 사업을 하는 연예인 대부분은 직업적으로 늘 불안하기 때문에 보다 안정적인 수익을 찾기 위해 도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1999년부터 약 3년간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개그 코너 갈갈이 패밀리 출신의 인기 개그맨 역시 이와 같은 이유로 사업에 뛰어들었는데요. 개그맨으로서 잘나가던 시절 30억 원을 벌었다는 그는 사업으로 더 큰 성공을 이루어냈을까요?

2000년대 초반 무려 20% 이상의 시청률을 자랑하며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꼽히던 개그콘서트. 그중에서도 인기 코너 갈갈이 패밀리의 멤버로 큰 사랑을 받은 개그맨 이승환을 기억하시나요? 어쩌면 무를 가는 박준형 옆에서 짙은 쌍꺼풀에 노랑머리를 하고 느끼남의 컨셉을 유지하던 그를 떠올리기보다 2000년대 중후반 전국적으로 유행한 '벌집삼겹살'이 더 쉽게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1997년 KBS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한 이승환은 짧은 무명생활 이후 1999년 갈갈이 패밀리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후 2002년까지 개그콘서트에서 해당 코너를 200회 이상 녹화하면서 전성기를 누렸지요. 당시 이승환은 갈갈이 패밀리의 인기를 바탕으로 매일 밤 나이트클럽 사회를 보고, CF까지 찍어 30억 원 이상을 벌어들였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인기가 사라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 있었고, 반짝 스타로 떠오르다 사라진 연예계 동료들을 보며 불안감을 가졌습니다.

스스로를 개그계 일인자가 될 재목은 아니라고 판단한 이승환은 보다 안정적으로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사업에 도전했습니다. 2002년 처음 뛰어든 사업은 영어와 율동,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저장하고 TV에 연결해 보는 유아용 셋톱박스였습니다. 당시 넘치는 열정만큼이나 마음이 급했던 이승환은 제품개발이 완료되기도 전에 마케팅을 위한 자회사를 차리고 사업을 확장해 나갔는데요. 제품이 아무리 좋아도 홍보를 못하면 망한다는 생각에 방송 제작사, 공연제작사, 출판사까지 손을 댔고 결국 사업은 돈 먹는 하마가  되었지요.


2003년 한 해에만 10억 원 이상 투자비가 들어갔다는 이승환은 이후 100여 곳에 셋톱박스를 팔아 매출 3억~4억 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투자비를 다 쓴 상태였습니다. 개그맨 활동으로 벌었던 30억 원은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 투자 받은 10억 원까지 총 40억 원을 2년 만에 다 날린 것이지요. 결국 단 돈 1000만 원이 없어 부도가 난 이승환은 가진 자동차와 아파트까지 압류 당하며 벼랑 끝에 몰렸습니다.

월수입이 억 단위이던 인기 개그맨의 생활을 포기하고 열정을 바친 사업에서 실패해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오른 이승환은 좌절했고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가양대교에 오른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다시 손을 내밀어 준 지인 덕분에 사업에 재도전하게 되었는데요. 이때 함께 외식사업을 해보자는 선배의 제안에 화답해 개발해낸 것이 바로 벌집삼겹살입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온몸을 바쳤다는 이승환은 전국 수백 곳의 삼겹살집을 다니며 맛과 서비스를 비교했고 업계 최초로 삼겹살에 칼집을 내는 시도를 해서 대박을 쳤습니다. 와인과 매실을 이용해 숙성한 삼겹살을 초벌 해 제공하는 삼겹살은 양념이 잘 베고 부드러워 큰 인기를 끌었지요. 또 2~3000원대의 저가형과 8000원 이상의 고가로 양분되어 있던 삼겹살 시장에 5500원 중가정책으로 도전한 것도 그의 생각이었는데요. 쌈 대신 자체 개발한 양파초절임 소스에 찍어 먹도록 세팅해 불필요한 밑반찬을 줄이고 가격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지난 실패를 발판 삼아 늘 초심을 유지하고자 노력한 이승환은 2009년 환율상승으로 큰 위기를 겪었을 때도 가맹점주들을 우선 배려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들여오는 삼겹살을 환율상승 전과 동일한 가격으로 납품한 것인데요. 본사의 타격이 컸지만 가맹점주들과의 신뢰가 쌓여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결정이었지요. 덕분에 2005년 1호점을 연 벌집삼겹살은 2013년 매출 250억 원을 찍고 가맹점 320개를 열었습니다. 대기업과 관공서에서는 성공한 사업가 이승환을 강사로 모시기에 바빴지요.

이승환 스스로도 성공의 기쁨에 도취되어 '내 능력이면 삼성도 만들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는데요. 자신감이 넘쳐 자만심이 된 탓일까요? 요리주점 '요란'에 벌집삼겹살의 세컨드브랜드 '도개걸육'까지 내놓으며 외식사업을 확장한 이승환은 전혀 다른 분야인 건설 시행사업에도 손을 댔습니다. 2012년 건설 시행사를 연 이승환은 대단위로 여러 채의 빌딩을 짓는 사업을 진행했고 분양을 마치면 1000억 원 이상 수익이 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내부 직원 중 한 명이 자금을 횡령하면서 사기를 당했고, 또 최종 개발 허가도 나지 않았습니다. 고금리 대출까지 받았던 이승환은 2년 만에 거짓말처럼 전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돼지 콜레라 사태가 터지면서 벌집삼겹살 사업에도 위기가 찾아왔는데요. 건설 시행사업 문제로 벌집삼겹살 사업에 신경 쓸 여력이 없던 이승환은 2014년 벌집삼겹살 사업의 지분 40%를 모두 포기하고 맨몸으로 회사를 나왔습니다.

두 번째 사업 실패에 대해 이승환은 "돈 욕심이 다시 나를 망쳤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탄탄대로를 걷던 외식사업에만 집중했다면 돼지콜레라의 위기 역시 잘 이겨내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요. 사업, 돈 그리고 사람에 배신 당한 이승환은 이후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걸었습니다. 사업을 진행하는 동안 하루 3~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실패한 자신에 대해 "나는 사업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다만 이승환에게는 "쉽게 벌어 쉽기 잃은 돈이 아니라는 자부심"은 남아 있었습니다. 사업이 잘 될 때도 늘 안주하지 않고 노력했기에 결과적으로 사업에 실패했지만 포기한 적은 없었지요. 덕분에 이승환은 지난 사업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노력을 발판 삼아 이승환은 마케팅 컨설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소상공인 대상의 창업 컨설팅 강연을 다니고 막 사업을 시작한 초기 기업들에게 직접 컨설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컨설팅과 강연으로 월수입 600만 원 이상을 번다는 이승환의 본업은 따로 있었는데요. 2014년 사업에서 손을 뗀 이승환은 세계 기후난민 구호사업과 자연보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W재단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돈을 벌기 보다 알차게 쓰는데 더 집중했습니다. 피지, 네팔, 캄보디아 등 재난이 발생한 국가를 누비며 돕는 재미를 느꼈지요.

사실 이승환은 사업을 시작한 초반인 2006년부터 이미 한 달에 1~2번씩 복지 회관을 찾아 밥차 봉사를 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업 홍보를 위해 시작한 활동이었고 '생색내기'에 가까운 활동이었는데요. 재단 활동을 통해 기부의 맛을 제대로 본 이승환은 다시 사업가로 돌아갔습니다. 사업의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지요. 이승환의 새로운 목표는 바로 직접 다문화 가족과 외국인 노동자를 후원하고 보호하는 재단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 호주머니에 들어갈 돈이 아닌 남 돕는 돈을 벌기 위해 사업가로 돌아온 이승환은 2017년 연말 친구인 가수 더원과 함께 중국에서 마스크팩 브랜드를 론칭했습니다. 앞서 벌집삼겹살 사업이 대박을 치던 2013년 이미 뷰티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한방미용예술학과 3학년에 편입해 관련 공부를 한 바 있는 이승환은 오래도록 묵혀온 꿈을 다시 꺼내 들었는데요. 그 외에도 한중 셰프들과 함께 중국 정저우에 글로벌 한식 프랜차이즈를 열었고, 열대 사막 채소인 아이스플랜트 재배 사업을 진행 중인 벤처기업의 CMO로도 활약 중입니다.

수십억을 잃는 사업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승환이 또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자부하는 데로 늘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왔던 사업에 대한 열정과 함께 소외계층을 돕는 재단을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생긴 덕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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