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선수가 세계 랭킹 24위에서 4위로 급등한 비결은 쌍꺼풀 수술?

"금메달은 하늘이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세계 대회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일이 그저 "열심히 해서"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면에서 비인기 종목으로 불리는 여자펜싱계에서 우리나라 선수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따고 선수생활 20년 동안 무려 99개의 메달을 획득했다는 이 선수는 레전드 그 자체입니다.

155cm의 단신으로 170cm가 넘는 해외 선수들과 맞붙어 세계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펜싱계의 레전드는 바로 남현희입니다. '땅콩검객', '미녀검객'이라는 별칭으로 익숙한 남현희는 타고난 운동신경 덕분에 초등학교 때부터 남자아이들 사이에 끼어 축구를 하곤 했는데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운동부에 들어가고 싶어 학교에 있던 펜싱부와 육상부 중 육상부에 자진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때까지 펜싱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던 남현희는 반에서 키카 두 번째 작았지만 순발력과 점프력이 워낙 뛰어나 멀리뛰기에서 1위를 했고 당시 체육교사인 펜싱부 코치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되었습니다. 덕분에 중학교 1학년 5월부터 칼을 잡게 된 남현희는 1년 3개월 만에 중3 언니들을 누르고 문화관광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중3이 되자 남현희에게는 라이벌조차 없을 정도였지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1학년 첫 전국 대회에서 언니들을 제치고 준우승을 차지했고, 이후에는 메달을 휩쓸었습니다. 하지만 독보적인 실력에도 늘 남현희의 발목을 잡은 건 바로 단신이라는 신체적 조건. 유럽의 최정상권 선수들이 180cm인 점을 감안하면 155cm인 남현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한 조건입니다. 때문에 뛰어난 기량으로 메달을 휩쓸면서도 남현희는 늘 '국내용'이라는 편견에 시달려야 했지요.

실제로 남현희는 고3이던 1999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5회 연속으로 통과하고도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국내용'이라는 이유에서였지요. 결국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남현희는 28~29살의 언니들의 출전 모습을 보면서 '내가 더 잘하는데'라는 억울함 때문에 어린 마음에 펜싱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면서도 보다 가까이서 경기를 보고 싶었던 남현희는 경기장에서 귀빈과 심판에게 다과를 제공하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세계적인 수준 선수들을 지켜봤습니다.

게다가 당시 남현희의 집안 사정은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30년 넘게 가내수공업으로 장갑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세 자매의 뒷바라지를 해온 아버지의 사업은 IMF의 여파로 압류 딱지가 붙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남현희가 대학 1학년일 때 세계청소년대회 출전을 위한 국내 선발전에서 8강에 올라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하자 엄마는 "현희야 정말 미안한데 이번엔 그냥 포기해 줄 수 없겠니"라는 답을 내놓았지요. 참가비 일부를 자비로 부담해야 했기 때문인데요. 결국 남현희는 눈물을 머금고 4강에서 일부러 지면서 세계 대회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이후 펜싱 선수로서의 목표 외에 가난을 벗어나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가 하나 더 생긴 남현희는 죽을힘을 다해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키를 극복할 방법으로 남들보다 2배로 움직이겠다는 계획을 세운 남현희는 다리를 찢어 공격하는 동작인 '팡트'를 집중 훈련했고 결과는 적중했습니다. 2001년 대표팀에 선발되어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그토록 원하던 금메달까지 거머쥐었습니다.

덕분에 대학 졸업 후 실업팀에 입단해 계약금 2000만 원을 받은 남현희는 1000만 원은 부모님께 드리고, 나머지 1000만 원으로 코치도 없이 국제 대회 4개에 참가해 2004년 아테네올림픽 출전권까지 땄습니다. 그리고 2005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여자 플뢰레 단체전 첫 우승을 이끌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요.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남현희는 2006년 때아닌 선수 자격정지 처분을 받게 됩니다. 이유는 놀랍게도 쌍꺼풀 수술. 당시 운동을 격렬하게 하던 남현희는 눈두덩이가 꺼지고 볼이 움푹 팬 자신의 얼굴을 보고 스트레스를 받았는데요. 특히 눈꺼풀이 쳐지면서 속눈썹이 눈동자를 찔러 경기력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지요. 때문에 대표팀 내에 언니들이 쌍꺼풀 수술을 하는 걸 보고 남현희도 수술을 결정했습니다. 세계선수권을 끝으로 그해 대회 일정이 끝나 경기가 없는 기간이었고 국가대표 총감독을 비롯해 당시 소속팀 코치진에게 허락까지 받았으니 문제 될 게 없었습니다.

외박 나가는 주말에 쌍꺼풀 수술과 볼에 지방 주입하는 수술을 한 남현희는 2~3일이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의사의 말과 달리 과도하게 부은 얼굴로 훈련장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한 펜싱협회 게시판에는 이에 대해 원색적인 욕설을 포함한 비난글이 올라왔지요. 일이 커지자 선수촌 내에는 남현희 선수에게 성형을 허락한 책임자가 잘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요. 분명히 허락을 받고 한 일이지만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볼 지도자에게 미안했던 남현희는 혼자 결정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남현희는 훈련 기간 중 무단으로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유를 들어 선수 자격 2년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펜싱협회 관계자는 남현희를 죄인 취급하며 퉁퉁 부은 얼굴을 정면, 좌우 다 찍어갔지요. 이후 남현희가 미리 허락을 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6개월 정지로 줄어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배신과 비난은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상처받은 땅콩검객 남현희는 자신을 향한 비난과 오해의 시선을 바꾸는 방법으로 '실력으로 정면돌파'를 선택했습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자격정지가 되어도 국제 대회 출전은 가능했기에 남현희는 개인 자격으로 국제 경기에 나섰고 잇따라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전까지 17~24위를 오가던 세계랭킹은 순식간에 4위권 안으로 급등했지요. 

그리고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개인과 단체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남현희는 다시 국민들의 응원과 사랑을 받는 미녀검객으로 거듭났습니다. 국민들의 응원에 힘입어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여자펜싱 최초로 은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요. 그리고 2008 베이징올림픽은 여자펜싱 최초 메달리스트라는 커리어 외에도 운명의 짝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이 끝난 직후 환영행사에서 남현희는 지금의 남편 사이클 국가대표 공효석 선수를 처음 만났는데요. 당시 남현희에게 5살 연하인 공효석은 마냥 동생으로만 느껴졌고 그렇게 누나동생으로만 친분을 이어가던 중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재회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습니다.

동생으로만 보였다는 남현희와 달리 첫 만남에서부터 아담하고 동글동글한 외모가 "딱 제 스타일이어서 호감이 갔다"라는 공효석은 연애 이후 사이클 성적도 좋아지고 국제 메달까지 땄다며 아내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는데요. 반면 남현희는 연애 당시 5살이라는 나이 차이에 부담을 가지고 이별을 선언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얼마 안 가서 공효석에게 다시 돌아간 남현희는 2011년 결혼에 골인했지요.

그리고 2013년 첫 딸을 출산한 남현희는 출산 2개월 만에 훈련에 복귀해 펜싱 국가대표 최초의 '엄마검객'이라는 별칭까지 추가되었습니다. 사실 단신의 체격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팡트'와 같은 특정 동작을 반복하다 보니 남현희는 뼈가 변형되어 왼쪽 엉치뼈가 오른쪽보다 2.5배 큰 상황이었고 출산에서도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몸조리가 채 끝나지 않은 두 달 만에 훈련에 복귀한 것은 엄청난 무리였지요.

하지만 소속팀에서 하루라도 빨리 복귀해 주길 원했고 남현희 스스로도 출산 후 40대까지 선수생활을 하는 유럽 선수들처럼 우리나라 펜싱계도 변화할 수 있도록 첫 발판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도전을 감행했습니다. 출산 후 전보다 16kg이나 증량되어 있던 몸무게를 빼고 다시 도전했지요. 그리고 전과 다름없는 기량을 되찾은 남현희는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을 금메달로 이끌고 개인전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이후에도 남현희는 국제대회 성적을 합산한 국제펜싱연맹 순위를 토대로 올림픽 출전권을 배분하는 규정에 맞춰 우리 여자 플뢰레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티켓을 따내는데도 기여했습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국내외 대회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진정한 '엄마검객'이 되었지요. 다만 남현희의 무릎에는 물이 찼고 엉치뼈 변형으로 인한 통증은 심해졌습니다.

유방암에 이어 갑상샘암 진단까지 받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딸아이 양육을 맡기는 것도 죄송스러웠던 남현희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다만 은퇴 이후의 삶을 고민하던 남현희는 2024년 IOC 선수위원에 도전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직전 올림픽 참가자여야 가능하다는 자격조건 때문에 도쿄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복귀했지요.

하지만 다친 무릎보다 엉치뼈보다 더 아픈 건 마음이었습니다. 도핑에 걸릴까 봐 약도 먹지 못하고 통증을 참아가며 훈련했지만 주위에서는 후배들의 자리를 뺏었다는 수군거림이 들렸고 선수 관리 시스템에서 은근히 배제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한방 해주길 바라는 부담은 계속됐지요. 결국 IOC 선수위원 출마와 국제대회 메달 100개라는 목표를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남현희는 지난 2019년 10월 전국체전 첫날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은퇴식을 치렀습니다.

이날 체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후배들과 나란히 단상에 선 남현희는 우리나라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국제대회 99개 메달을 획득한 선수라고 하기에는 다소 조촐한 은퇴식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은퇴한 남현희는 최근 한 방송을 통해 운동에 집중하느라 소홀했던 남편과 딸, 그리고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근황을 전했습니다. 더불어 펜싱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지도자로서 펜싱계에 힘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지요.

이날 방송에서 남현희는 과거 성형파문으로 논란이 되었을 당시 자신이 "펜싱계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괴로웠다"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남현희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그의 26년 선수생활은 세계무대에 우리나라 여자펜싱의 위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중요한 기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더불어 155cm 단신이라는 불리한 체격조건을 훈련과 의지로 이겨냈다는 점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인물임에 분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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