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시켜서, 친구가 권해서 시작한 일에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애정을 쏟기 힘듭니다. 무슨 일이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더 열심히 하게 되는 법이죠. 특히 엄마의 잔소리가 섞여 있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이상하게 듣고 싶지 않은 게 청개구리 같은 자식의 마음인 걸까요?
비싼 레슨비까지 들여가며 어머니가 서포트 해줄 당시에는 "하기 싫다"며 그만두었던 당구가 엄마 몰래 다른 가게에서 쳤더니 "그렇게 재밌더라"라는 철부지 딸이 있습니다. 청심환을 먹고 아저씨들과 당구 내기를 하면서 프로의 꿈을 키웠다는 주인공은 당구여신 한주희 프로입니다.
84년생인 한주희 선수는 어린 시절 미술,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예체능 분야를 섭렵했습니다. 다만 스스로 말하길 "끈기가 없는 편이라 모두 중도에 그만뒀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미대에 진학했으나 학교를 자퇴했고 이후 다니던 건설회사도 일찍이 그만두었죠.
그 무렵 한주희 선수의 어머니는 당구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딸이 당구에 재능까지 보이자 '프로를 시켜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적극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엄마가 시켜서 반강제로 시작한' 당구는 한주희 선수에게 숙제와 같은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프로선수에게 6개월간 레슨을 받던 당시에 대해 한주희는 "억지로 배우는 느낌이 드니까 재미없더라. 반 년만 배우고 관뒀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이후 어머니를 도와서 당구장을 관리하던 한주희는 당구대, 당구공 닦고 당구채를 손질하면서 지루한 틈을 타 취미 삼아 당구를 쳤습니다. 더 이상 의무적으로 당구를 쳐야 되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되려 당구가 재밌고 즐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한주희는 프로의 레슨 대신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물러보며 당구 독학에 나섰는데요. 손님들에게 "기본기가 좋다, 스트로크가 좋다"라며 칭찬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었고 더 신나는 마음으로 당구에 빠졌습니다.
뒤늦게 당구의 매력에 빠진 한주희는 어머니 가게 외 다른 당구장을 다니며 연습 상대를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주로 중년 남성들이 많이 찾는 동네 당구장에서 무작정 시합을 부탁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청심환까지 먹고 갔다고. 처음에는 혼자 당구 연습을 하러 온 젊은 여자를 의아하게 여기던 손님들도 쓰리쿠션 14점을 내는 한주희를 보고 놀랐는데요.
2014년 12월, 어머니는 운영해오던 당구장을 접으려고 정리를 시작한 반면 한주희 선수는 당구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인생 처음으로 중도 포기하지 않고 몰입한 분야가 생긴 것이죠. 이에 한주희 선수는 수많은 당구장에 원정을 다니며 독학 훈련을 이어갔는데요. 이때 우연히 방문한 한 당구장에 생활체육관계자가 한주희 선수의 연습모습을 남다르게 지켜보고 "아마추어 경기가 열리는데 심판으로 와줄 수 있는지" 제안했습니다.
아마추어 경기라서 부담 없다는 권유에 호기롭게 심판을 수락한 한주희는 막상 경기장에 가서 방송 중계를 한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얼떨결에 카메라 앞에서 심판으로 나선 한주희는 이날을 계기로 2015년 2월에 열린 스카치 대회에는 선수로 출전하게 되었는데요. 처음으로 출전한 해당 대회에서 한주희는 우승후보에 맞서 16강까지 진출하면서 대회의 가장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주최 측에서는 버리는 카드로 생각하고 우승 후보의 상대로 내보낸 신인이 우승 후보를 꺾는 반전을 그렸는데, 그 반전의 주인공이 여신급 미모까지 갖추었으니 시청자들과 매체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죠. 대회 이후 한주희는 차유람의 뒤를 이을 '당구여신'으로 꼽히며 당구 팬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때까지도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는데요. 당시 한주희는 반짝 스타가 된 소감에 대해 "당구를 치는 동호인 일뿐이다"면서 "외모가 조금 예뻐서 주목받은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한주희는 이후 당구 채널 빌리어즈TV의 MC로 활동하면서 '큐타임즈', '하이큐'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게임광고를 찍거나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당구보다는 방송에 집중하는 모습이었죠.
2017년부터 2년간 큐를 놓았다는 한주희는 2019년 12월 유튜브 방송 '빌리 퀸'에 출연하면서 당구에 다시 매진하기 시작했는데요. 노출의상이나 자극적인 콘텐츠가 아닌 당구에 대한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채널 방향이 마음에 들었다는 한주희는 해당 채널에서 프로당구 도전기를 연재하면서 실제로 지난해 7월 LPBA 선수로 등록했습니다.
프로 선수로 출전한 첫 시즌에서 5차례 PQ라운드에서 모두 탈락하는 좌절을 맛본 한주희 선수는 올해 4월 유튜브 방송까지 그만두면서 일산의 당구장에서 연습에만 매진했습니다. 덕분에 지난 6월 열린 LPBA 챔피언십 PQ라운드를 조 1위로 통과하면서 64강 진출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죠.
한편 한주희는 최근 대회를 마치고 중앙일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당구여신이라는 말은 포켓볼과 3쿠션을 동시 제패한 김가영 같은 선수에게 붙어야 한다. 내 실력으로는 한참 멀었다"라며 "언젠가 김가영 선수와 붙어보고 싶다"라는 포부를 전했는데요. 단순히 외모로 주목받던 시기를 지나 실력까지 갖추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야말로 '당구여신'이라는 표현에 걸맞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