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친구"라는 카피로 화제가 된 광고를 기억하시나요? 배우 유오성이 출연한 해당 광고는 한 증권사의 홍보를 위해 제작된 영상으로 투자를 할 때 YES도 NO도 소신 있게 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내용인데요. 신선한 카피 문구와 인상 깊은 영상미 덕분에 투자자가 아닌 대중들에게도 신선한 메시지로 남았습니다.
이처럼 대다수가 반대하는 방향임에도 소신대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용기는 자기 분야에 대한 충분한 자신감으로부터 오는 것이겠지요. 많이 공부하고 고민해서 낸 결과일수록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것.
1995년 한 공중파 PD는 자신이 연출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국내 최초로 자막을 도입했다가 "우리가 청각장애인이냐"라는 항의를 들었음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국내 최초로 예능 프로에 자막을 도입하고 부장에게 "미쳤냐"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주인공은 MBC 출신 김영희 PD입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자막은 정보를 전달하는 부분에만 사용되었는데 당시 MBC 소속이던 김영희 PD는 일본 후지TV에서 6개월 연수과정을 거친 후 '국내 예능 프로에 자막을 통해 생동감을 주고 싶다'라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1995년 김영희 PD는 자신이 연출 중이던 'TV파크'라는 프로에 수백 개의 자막을 사용했고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방송국에는 "우리가 청각장애인인 줄 아느냐"라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논란이 일자 직속 상사인 부장 역시 김 PD에게 "미쳤냐"라며 자막을 뺄 것을 요구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희 PD는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갔고 그로부터 6개월 후 대한민국 예능은 모두 자막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밀고 나간다는 김영희 PD는 의외로 PD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기 확신이 없었습니다. 다수 인터뷰를 통해 "왜 PD라는 직업을 선택했느냐라는 질문이 가장 어렵다"라고 말한 바 있는 김영희 PD는 사실 어린 시절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는데요.
경희대 부속초등학교 재학 시절 야구선수로 활약했고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야구 명문중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꿈을 접었습니다. 이후에는 특별한 목표 없이 그저 중고등학교 내내 반장을 하면서 공부도 잘하고 활동적인 모범생으로 자랐지요.
다만 군인 출신으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그 즈음 대학에 입학한 김 PD는 그저 '등록금이 가장 싸다'라는 이유로 서울대 사범대학을 선택했습니다. 덕분에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김영희 PD는 교사보다는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일을 찾아 PD시험에 응시했는데 단번에 붙으면서 MBC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조연출을 거쳐 정식 PD가 된 이후 김영희 PD는 '이경규의 몰래카메라'를 이어 맡으면서 자신의 색깔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 '양심냉장고'를 통해 일명 스타PD가 되었는데요. 기획 당시 정지선을 지키는 차량 운전자에게 냉장고 선물을 준다는 콘셉트에 대해 "이게 무슨 재미가 있냐", "톱 연예인이 나와야 시청률이 나오는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라니", "정지선 지키는 사람도 없을 거다" 등 강력한 반대에 맞서면서도 김 PD는 프로그램 기획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프로그램 편성에 성공한 이후에도 촬영 과정은 더 힘들었습니다. 첫 촬영 날 새벽 3시까지 나타나는 모든 차들이 정지선을 지키지 않자 추위와 졸음에 못이긴 스태프들은 "할 만큼 했으니 철수하자"라고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김영희 PD는 "해가 뜰 때까지 촬영할 것이고 주인공이 안 나타나면 내일 다시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는데요.
그날 새벽 4시 13분 기적처럼 양심냉장고 1호의 주인공이 나타났습니다. 텅 빈 도로 위에 길을 건너는 사람도, 보는 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끝까지 빨간 신호를 지키며 정지선에 정차한 주인공 차량은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차를 출발하려고 하는 바람에 김영희 PD가 직접 몸으로 차량을 막아서고 인터뷰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차량에서 내린 주인공은 지체장애인 부부 이종익 씨 내외였지요.
'왜 신호를 지키셨냐'라는 질문에 "내가 늘 지켜요"라는 답변을 내놓은 이종익 씨의 모습은 전 국민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해당 코너의 2회에 1회분을 재방송으로 내보내는 파격 편성까지 이루어졌습니다. 덕분에 양심냉장고 방영 후 '일밤'의 시청률은 한 자릿수에서 30% 이상으로 급등했습니다.
방송 초반 협찬 없이 '가장 비싼 선물을 주고 싶다'라는 기획으로 냉장고를 상품으로 마련한 김 PD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본사에서 냉장고를 무료로 협찬받아서 줄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후 김영희 PD의 일명 '착한 예능' 콘셉트는 국내 예능의 판도를 바꿔놓았는데요.
양심냉장고 이후 내놓은 '칭찬합시다', '느낌표-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는 유명 연예인 없이 일반인 출연자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꾸리면서도 큰 인기를 얻었고, 청소년에게 관심을 둔 '신동엽의 하자하자', '얘들아 행복하니' 등의 코너와 장애인에게 관심을 둔 '눈을 떠요' 같은 코너는 0교시 폐지와 각막이식수술 진행 등 사회적 영향력까지 행사했습니다.
덕분에 김영희 PD는 부당대우로 재직 중이던 2005년 45세 나이로 MBC 최연소 예능국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당시 MBC측은 그를 국장직에 임명하기 위해 부장대우를 국장으로 선임할 수 없는 기존 규정을 수정하기까지 했습니다.
막 예능국장 자리에 오른 김영희 PD는 당시 시청률이 부진하던 '무한도전'의 폐지를 막은 장본인이기도 한데요. 워낙 시청률이 안 나오다 보니 편성부에서는 프로그램 교체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오갔고 이런 상황에서 김 PD는 편성 책임자들에게 "다른 거는 내가 다 바꿔도 이건 안 바꾼다"라고 적극 설득했습니다.
당시에 대해 김 PD는 "지켜봤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재미있는데 시청 습관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을 계속 본다고 생각했다"면서 확신으로 밀고 나간 이유를 전했고 이에 유재석은 "국장님이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해'라고 말했다"면서 "그 한마디가 저희들한테 힘이 많이 됐다. 지나서 하는 이야기지만 '이거 어떻게든 한 번 해봐야겠다.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라고 생각했다"라고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2011년 내놓은 '나는가수다' 역시 화제성과 시청률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역대급 히트작이었습니다. '나가수'는 당시 아마추어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세이던 분위기를 프로의 세계로 끌어들여 국민적 관심을 얻었습니다. 이후 김 PD는 '나가수'의 포맷을 구입한 중국 후난위성TV에 제작노하우를 전수하고자 중국에 건너갔다가 중국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2015년 MBC를 퇴사하고 본격 중국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김영희 PD는 중국의 수십 군데 방송국과 제작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왔으나 MBC에 적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협상이 힘들어 고사했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해 '개인'의 입장이 아니라 "대한민국 시청자와 MBC가 만들어준 공인에 가까운 신분이니 중국 방송사 임원으로 가지는 않겠다"라며 고액의 연봉 제안을 거절한 바 있는데요.
한국 PD 최초로 중국 현지에 외주제작사 B&R을 세운 김영희 PD는 2016년 후난위성TV 예능프로 '폭풍효자'를 선보였습니다. 할리우드보다 더한 신급 대우를 받는다는 중국 연예인들은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기로 유명한데, 김 PD는 이들을 설득해 자신의 고향 혹은 부모의 고향에 가서 부모와의 일상을 공개하는 콘셉트로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12부작 해당 프로를 만드는 데 들어간 제작비는 무려 400억 원, 스태프는 총 600명, 총 수익 800억 원에 순수익만 해도 200억 원을 기록하면서 김 PD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의 예능 판도를 관찰 예능으로 바꿔놓았고 스튜디오물이 전부이던 중국 예능에 야외 버라이어티를 자리 잡게 했지요.
하지만 그런 김영희 PD 역시 한한령의 여파는 피하지 못했는데요. 2016년 11월경 찾아온 한한령은 뚜렷한 실체는 없으면서도 프로그램을 기획한 한국 제작진의 이름을 내걸지 못하게 하는 등 영향이 어마어마해서 결국 김 PD 역시 중국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2018년 11월 김영희 PD는 MBC로 돌아와 콘텐츠 제작 부문 총괄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최근 '유퀴즈온더블록'에 출연한 김영희 PD에게 유재석은 무한도전이 폐지설을 겪을 당시 프로그램과 자신을 믿고 폐지를 막아준 김 PD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누군가에게 애정 어린 관심은 그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요. 김영희 PD의 소신으로 탄생할 제2의 양심냉장고, 제2의 무한도전을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