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주식투자로 수익을 낸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투자자로 나서려고 한다는 고민을 털어놓은 주부 사연자들이 많습니다. 야근에 특근까지 해가며 받는 월급을 하루아침에 벌기도 하니 직장 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마음도 이해되는데요. 다만 주식시장이 늘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 안정적인 수입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내들의 마음은 타들어갑니다.
한편 4억으로 시작한 주식투자가 성공하면서 500억 원으로 불어났음에도 자신의 직업을 내려놓지 않아 화제가 된 슈퍼개미가 있습니다. 수백억 자산가가 되고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그의 직업은 카이스트 교수직.
2004년 4억 원으로 시작한 주식투자가 불과 11년 만에 500억 원 이상으로 늘었다는 투자고수는 김봉수 카이스트 명예교수입니다. 59년생인 김봉수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 출신으로 UC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1984년 인제대 화학과 교수를 시작으로 경북대 화학교육과를 거쳐 카이스트 화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이어왔습니다.
다만 나노과학 연구분야에서 나름의 성과를 내는 등 연구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김봉수 교수는 2000년 초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초중고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통장잔고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 우연히 학창시절에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동창이 의대에 편입한 후 의사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고는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는데요. 외제차를 끌고 와서 강남의 비싼 술집에 데려가는 친구에 비해 자신은 자녀들의 유학비조차 부족해서 빠듯하게 사는 삶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당시 연봉이 5천만 원 정도이던 김 교수는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유학비를 충당하기 어려워서 국내 외국인학교에 보내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2년 주식으로 큰돈을 번 한 친구가 김 교수에게 주식투자를 권유했고, 김 교수는 연구자답게 우선 투자에 뛰어들기 전 우선 책을 사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6개월간 주식 관련 책 200여 권을 읽은 김 교수의 결론은 "집을 팔아서라도 주식을 사야한다"는 것. 앞서 김 교수 역시 아버지가 어린 시절 주식투자로 집 한 채 값을 날린 기억이 있었기에 '주식은 절대 해선 안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요. 다만 유학시절 옆 동네의 한 부자 이웃이 애플에 투자해서 돈 버는 걸 본 후 주식투자에 관심이 있던 차였고, 미국 연구소에서 근무할 당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의 95%가 마이크로소프트인 것을 보고 '저기 투자하면 어떨까'라는 막연한 고민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비하면 MS주가는 5000배가량 오른 셈.
미국에서의 경험과 책을 통해 분석한 내용을 종합하면 '한국 주식은 다른 나라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저평가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김 교수는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담보 잡고 대출 낸 4억을 종잣돈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했습니다. 대중이 간과하고 가치가 저평가된 주식을 찾아 투자했는데, F&F, 삼광유리, 고려신용정보, 세진티에스, 동양에스텍, 부산방직 등 소형주 투자로 대박이 났습니다.
"대기업 투자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는 김 교수는 대기업의 경우 사업영역이 넓어 분석이 어렵기 때문에 피하고 대신 "중소기업은 물건 하나만 비중 있게 만드니 간단하고 투자하기도 쉽다"라고 말합니다. 또 종목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나를 만족시키는 제품'과 '경영자' 두 가지를 꼽는데요. 백화점에 자주 가서 물건을 보고 구입한 물건이 마음에 들면 주식을 사 모으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실제로 2009년 제네시스를 구입하고 만족한 김 교수는 저평가된 부품 업체를 찾아 대원산업을 샀는데, 당시 매출 200억 원이던 회사가 5000억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김 교수는 10배 넘는 수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어보고 좋아서 아디다스를 만드는 한국 중소기업을 찾아 투자했고, 노스페이스가 좋아서 코오롱 주식을 매입했다가 3배 넘는 수익을 냈습니다.
비타500과 진라면이 맛있어서 광동제약과 오뚜기를, 의자가 편해서 시디즈를 샀다는 김 교수의 투자방식은 들을수록 너무 쉬워서 되려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주식투자에 뛰어들 당시, 수익 100억 원을 목표로 한 김 교수는 수익이 100억 1원이 되는 날 학교에 사표를 내고 자유로워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2014년 9월 10일 실제로 투자수익이 100억 원이 넘은 순간 김 교수는 주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요.
당시에 대해 김 교수는 "주식투자로 100억 원을 벌었는데 이상하게 주식가격이 계속 오르더라. 당황했다. 한 달 동안 고민했다. 난 아무것도 안 하는데 돈이라는 게 계속 늘어나는 거다. 무섭더라"면서 "월급쟁이로부터 탈출이라는 소박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100억 원이 넘으면서 돈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표를 내는 대신 주식투자와 연구활동을 상생하기로 마음먹은 김 교수는 오히려 둘을 함께 했기에 시너지가 났다고 말합니다. 주식이 내려가서 우울하면 잡생각하지 않으려고 연구를 더 열심히 하고 논문도 많이 썼다는 것. 또 질병 진단 관련 연구를 하면서 알게 된 '씨젠'은 상장 전부터 눈여겨봤지만 임상 등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이오 특성상 "지금 투자해서 10년 후에 벌어도 돈 쓸 시간이 없겠다"싶어서 투자를 포기한 사례입니다.
연구자이자 투자자이기도 했던 김 교수는 2015년 학회장을 맡았을 당시 분기마다 50명씩 모여 회의하는 자리에서 자리에 모인 교수들에게 좋은 종목을 하나씩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박봉인 교수월급을 알기에 마음을 쓴 것이지만 귀담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중 단 한 명이 김 교수가 알려준 종목을 모두 사서 돈을 꽤 벌었다고 하네요.
수백억을 굴리면서도 오랜 시간 교수직을 유지한 김봉수 명예교수는 지난 2019년 6월 정년을 몇 년 앞두고 퇴직했습니다. 교수를 시작할 때부터 60살 전에 은퇴하려는 계획이었다는 김 교수는 "연구가 잘 맞아서" 계획보다 오랜 21년간 교수 생활을 한 셈입니다.
교수직을 내려놓은 지 2년 차인 최근 김봉수 교수는 HelloDD와의 인터뷰에서 여전히 대전에서 생활 중인 근황을 전했습니다. 인터뷰에서 그는 "작년 3월부터 급등하는 주식 종목이 늘어 계속 사고팔고를 반복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면서 "잠이 없어 6시에 일어나 장이 열리면 가만히 모니터만 들여다볼 때도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수치들을 보며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한다"라고 전업투자자의 일상을 공개했는데요.
다만 연구를 관두고 가진 시간 전부를 주식에 투자하면 더 많은 수익을 낼 줄 알았지만 "큰 변동은 없다"는 김봉수 명예교수는 "연구자란 직업이 주식에 투자하기 최고의 직업이었다"라며 슈퍼개미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