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보 백댄서로 시작해 2년 만에 5억 번 고등학생이 일용직 막노동한 이유

돈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는 것은 불행을 가져오기 쉽습니다. 생활고를 넘어 빚 독촉을 받는 상황이라면 나 자신은 물론 가족과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들지요.

갓 스무 살이 되자마자 2억 원이 넘는 빚을 떠안았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고등학생 어린 나이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가 순식간에 억대 빚을 지고 막노동판으로 갔다는 주인공은 방송인 최제우입니다. 90년대 후반 최제우의 활동 모습을 기억하는 대중들에게는 하이틴 스타 '최창민'으로 더 익숙한 그는 20대에 겪은 수많은 악재를 벗어나고자 개명까지 했는데요. 자신의 이름마저 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는 최제우의 사연은 무엇일까?

가난한 산동네에서 늦둥이로 태어난 최제우는 어린 시절 분유값이 없어 굶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17살 터울인 최제우의 친형은 이미 동생이 태어나기 전 학업을 포기하고 돈벌이에 나섰는데, 늦둥이 동생에게 분유 대신 싼 커피우유를 사 먹여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다행히 건강에 이상 없이 자랐지만 최제우는 꿈을 가지기에 앞서 '돈을 벌어야 한다'라는 강박을 가졌습니다. 연탄불을 때는 산동네 집에서 학교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고 이런 상황에서 최제우는 그저 가족들을 위해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매여있었고, 실제로 초등학생 때부터 분뇨 제거 지게일, 전단지 아르바이트 등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다.

심지어 12살에는 동네 장의를 통해 일하기도 했는데, 정신적인 충격을 염려해 만류하는 장의사에게 "제발 시켜만 달라"라고 조른 끝에 장의사 보조로 일하게 된 것. 당시에 대해 최제우는 "잡일하며 장의사 보조로 일하다가 교통사고 당한 시신을 처음으로 봤고 감당하기 심든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이후 드라마 '마지막 승부'를 통해 농구 붐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막연히 '농구를 잘하면 대학도 갈 수 있고 돈도 벌겠다'라고 생각한 최제우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농구공을 사서 밤새 농구 연습을 하기도 했는데요. 돈벌이에만 매달리던 그때 기회는 우연한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우연히 친구 어머니를 통해 방송국 견학을 갔다가 그룹 룰라의 댄스팀 단장 눈에 띄게 된 것. 무엇보다 "춤으로 돈도 벌 수 있다"라는 말에 설득된 최제우는 그날부터 바로 연습을 시작했고 댄스팀에 갑작스럽게 생긴 빈자리를 채우면서 가수 박지윤과 터보 등의 무대에 함께 서게 되었습니다.

1997년 터보의 무대에 서면서 활동을 시작한 최제우는 백댄서임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에 대해 최제우는 "터보가 다음 스케줄이 있었지만 내 팬 레터와 선물이 많이 들어와서 기다려주셨다"라며 김종국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댄서로 유명세를 얻은 최제우는 이후 의류 브랜드 SPORT REPLAY의 모델로 발탁되면서 본격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고, 잡지 등에서 패션모델로 활약하며 인지도가 올라갈 무렵 수많은 연예기획사로부터 러브콜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만 1997년 당시 고1의 나이였던 최제우는 고가의 벤을 타고 오는 대형기획사의 매니저들에게 위압감을 느꼈고 무서운 마음에 쉽사리 계약을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버스를 타고 왔다는 한 매니저가 햄버거 단품을 주며 함께 일하기를 제안했고 이에 최제우는 '나처럼 가난을 경험한 사람이니 잘 통할 것'이라고 믿고 매니지먼트 일을 맡겼습니다.

이후 1998년 시트콤 '나 어때'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은 최제우는 같은 해 10월 가수 활동까지 시작했습니다. 조선음향과 음반활동을 계약해서 발매한 첫 앨범 '영웅'은 그야말로 대히트를 쳤고 뮤직비디오 속에서 최제우가 교복 안에 후드티를 입고 나온 패션까지 유행할 정도였지요.

첫 앨범의 후속곡 '짱'까지 흥행에 성공하면서 최제우는 그야말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각종 예능 프로에 출연했고 송혜교와 함께 교복 광고를 찍는 등 90년대 후반 대표적인 하이틴 스타로 등극했습니다.

최제우가 바쁘게 일하는 동안 재정관리는 모두 매니저가 맡았습니다. 앞서 대형 기획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소규모 소속사와 계약한 최제우는 조선음향과의 음반계약을 통해 받은 상당한 금액의 계약금 가운데 절반을 해당 매니저에게 주면서 소속사 운영에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매니저에게 통장과 인감까지 맡기며 모든 권한을 위임한 상황이었는데, 워낙 쉴틈없이 일하다보니 수익 중 일부는 최제우의 부모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소속사 운영에 사용한다는 매니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지요.

하지만 HOT, 젝키와 음악프로 1위를 다툴 정도로 잘나가던 최제우는 2년 여의 활동 후 2억 원의 빚만 지게 되었습니다. 연기자로서는 데뷔작으로 신인상을 수상하고 가수로서도 누구보다 성공하면서 실제로 수익을 5억 원이상 냈지만 그 돈은 최제우 본인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최제우가 모르는 사이에 매니저가 이중계약을 진행했고 합병된 후 잠적했기 때문인데요.

뒤늦게 정산확인을 하자 5억 원 넘는 수익 대신 2억 원의 빚이 남아있었고, 오히려 불법으로 합병한 회사 측에서 이중계약된 부분을 돈으로 토해내라며 밤업소 행사까지 강요했습니다. 갓 스무살이 된 최제우는 밤 업소 일이 너무 싫어서 일부러 전봇대에 팔을 부딪쳐 상황을 모면하기도 했지요.

이후 최제우는 계약금으로 묶인 1억 원을 갚기 위해 3년 가까이 일용직으로 일했는데요. 당시에 대해 최제우는 "공사장에서 고소공포증도 생겨 줄에 메달려 일하면서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빚을 갚고도 어려운 상황 때가 되면 또 일용직을 했고 결국 손가락도 다쳤다. 제때 수술하지 못해 손가락이 펴지지 않는다"라고 회상했습니다.

또 최제우는 당시 절친한 동료였던 김승현의 빚까지 함께 갚았습니다. "내 소개로 같은 소속사로 옮겼던 승현이를 내가 왜 끌고 와서 얘 인생을 망쳤을까 생각해서 죄책감이 있었다"는 최제우는 김승현 몰래 소속사 문제로 생긴 그의 빚까지 함께 변제했습니다. 일용직과 택배 일 등으로 빚을 갚아가면서 주변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까지 가졌던 최제우는 '가족들에게 돈을 주고 차라리 내가 감옥에 가는 게 맞았나'라는 후회가 들어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습니다.

이후에는 열심히해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을 원망하면서 역술인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용한 역술인이 권하는대로 개명을 했고 또다른 역술인이 "20대 때 죽어야했는데 왜 살아일지?"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힘들었던 20대 시절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했던 자신의 마음을 뚫어보는 역술인의 모습에 '운명은 정해져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된 것.

이를 계기로 명리학 공부를 시작한 최제우는 "명리학 공부가 아니면 돌파구가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도 내 인생 얘기를 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명리학을 통해 내 삶을 들여다봤고 힘들었던 이유와 삶의 흐름에 대해 깨달았다"라고 덧붙였는데요. 최제우의 믿음대로 인간의 운명이 정해진대로 흘러가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왜 나만 안될까'라는 원망으로 가득차 있던 마음이 "더이상 화도 안 나고 밉지도 않고 납득하게 되었다"라는 것만으로도 최제우 개인에게만은 충분히 의미있는 공부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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