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시계제조사, S텔레콤, I건설사...주식고수들이 선택한 바로 그 종목

올해 초 코로나바이러스 공포로 외국인이 대규모 매도세를 보이면서 국내 주식시장이 폭락을 이어갈 무렵, 그 공포를 이겨내고 순매수한 용감한 개미들은 용기의 대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지금 동학개미운동의 성과는 한풀 꺾였고 폭락했던 종목이 대부분 제자리를 찾으면서 주식시장에서 '진짜 실력'을 발휘해야 할 때가 다가왔지요.

주변 사람들은 주식으로 "재미 좀 봤다"던데 내가 가진 종목만 늘 '파란색'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짜 실력이 필요한 지금, 고수들의 비법을 만나봅시다.


강방천

'동학개미운동'에 대해 "역사적인 사건"이라면서도 "폭락장의 공포를 이겨낸 대가일 뿐 실제 투자실력은 아닐 수 있다"라며 조심스러운 조언을 건넨 주식고수가 있습니다. IMF 때 600원짜리 주식을 사서 두 달 만에 156억 원을 벌어들인 신화의 주인공 강방천 회장인데요. 스스로 IMF 당시 폭락장을 이겨낸 경험이 있기에 보다 현실적인 조언을 내놓은 것이지요.

59년생 강방천 회장은 염전에서 일하는 부모의 3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나 그야말로 모범생의 길을 걸었습니다. 비평준화 명문고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한국외대 경영학과에 4년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지요. 대학 때도 열심히 공부해 7학기 만에 조기졸업한 강 회장은 학교 추천으로 현 SK증권인 동방증권에 입사했는데, 증권업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쌍용투자증권으로 이직했습니다.

쌍용투자증권 시절 강 회장을 '잘나가는' 투자자였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 유학을 계획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 준비를 하다가 자녀가 태어나고 개인적인 일이 겹치면서 유학을 포기하게 되었는데, 대신 증권사에서 알게 된 지인 둘과 함께 '이강파이낸스'라는 이름으로 투자회사를 차린 것. 95년 회사를 설립하자마자 시장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회사 내 펀드매니저를 맡은 강 회장은 운용할 돈이 없어서 일도 하지 않고 월급을 받을 정도였지요.

IMF를 앞둔 최악의 상황에서 강 회장은 국내 자산 가치에 거품이 많다고 판단해 달러를 사들였습니다. 당시 1달러가 한화 800원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1달러 환율이 1460원까지 치솟으면서 투자한 3400만 원이 6000만 원으로 불렸습니다.

이후 IMF가 터지고 증권사 주식이 폭락하는 상황에서 강 회장은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증권사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판단으로 증권사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습니다. 1200원에 산 주식이 반 토막 나서 600원이 되자 강 회장은 망연자실하는 대신 오히려 더 많은 주식을 매수했지요. 그리고 600원짜리 주식은 단 두 달 만에 12000원까지 올랐습니다. 수익률 2000% 낸 셈. 이때 강 회장이 벌어들인 수익이 67억 원입니다.

이후 강 회장이 눈길을 돌린 곳은 홈쇼핑과 인터넷쇼핑입니다. '안방쇼핑'시장이 열린 것을 보고 '그걸 누군가 배송할 텐데'라고 생각한 강 회장은 2개의 택배 회사에 투자해 자산을 150억 대까지 불렸습니다. 이에 대해 강방천 회장은 "거의 한 달 사이 일어난 일이다. 3~4년 기다렸는데 너무 빨리 회복된 것 아닌가 싶더라"고 말했습니다.

99년 150억 원의 자산 가운데 16억 원을 투자해서 에셋플러스 투자자문주식회사를 설립한 강 회장은 여전히 '가치투자'를 강조하는 잘나가는 투자가입니다. 강 회장이 말하는 주식투자의 철학은 "지갑을 살펴라"라는 것인데, 인기 있는 주식이나 소문이 난 주식보다는 시장 사람들이 좋게 평가하는 주식 즉, 사람들의 지갑이 열리는 곳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강 회장이 최근 한 예능에 출연해 자신이 차고 있는 고가의 손목시계를 두고 "소비를 하고 마음에 들면 투자한다"라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되어 해당 브랜드인 '바쉐론 콘스탄틴'이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존 리

강방천 회장이 소비를 바탕으로 투자한다면 또 다른 주식대부 존리는 소비하지 않는 부자로 유명합니다. "부자인 체하지 말고 진짜 부자가 돼라"라고 강조하는 존리는 실제로 집을 소유하지 않고 월세로 살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58년생 존리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12살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일찍이 돈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연세대 경제학과 재학 도중 월급쟁이가 되는 게 싫어서 자퇴를 결정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지요. 이후 미국에서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힘들게 뉴욕대학 회계학과를 졸업했고, 졸업 후 7년간 회계법인 KPMG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1991년부터 미국 스커더스티븐슨앤클락에서 포트폴리오 매니저로 전향해서 본격 투자가로 나섰습니다.  특히 세계최초 한국투자펀드인 '코리아펀드'를 1991년부터 15년간 운용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스타투자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코리아펀드는 한국주식에 투자한 세계최초 뮤추얼펀드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 것인데, 당시 저평가되던 한국의 주식들을 사들여 장기투자를 통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 상장 당시 6백억 원이던 펀드가 2005년 1조 5천억 원으로 성장했으니 존리의 자산운용 비법이 눈길을 끌 만합니다.

개인투자자로서 존리의 수익률도 만만치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주식은 팔지 않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존리는 주식을 팔아야 하는 예외 조항으로 '은퇴 후 노후자금이 필요할 때'와 '세상이 변할 때'를 꼽는데요. 휴대폰이 막 보급되던 시기에 3만 원에 산 SK텔레콤의 주식은 9년이 지나 휴대전화 보급이 완료되고 경쟁사가 많이 생겨서 비용이 올라갔기에 440만 원에 팔았습니다.

금시계를 차지 않는 존리 역시 금시계 애호가 강방천 회장과 마찬가지로 투자종목을 선택하는 기준 1순위로 "주위를 둘러보라"라고 말합니다. 지난 6월 한 예능프로에 출연해"카카오나 네이버를 하면서도 주식 살 생각은 왜 하지 않느냐"라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되어 방송 직후 해당 종목의 주가가 급등하기도 했지요.

다만 부동산투자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놓는 것에 대해서는 한국시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이에 대해 존리는 "부동산 얘기를 하자마자 95%가 나를 비난하더라"면서 "자산의 20~30%는 부동산에 투자해도 괜찮지만 5백만 원 월급쟁이가 20억짜리 집을 사는 게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자신은 광화문 사직동의 한 월세에서 산다고 말하며 "50년 전 100평 집을 샀다고 5만 평이 되지는 않는다. 부동산은 인플레이션을 따라가게 돼 있다"라며 "주식보다 부동산이 오르면 그건 자본주의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김봉수

앞서 강방천 회장과 존리 대표가 증권사를 거친 투자 전문가라면 500억 원을 수익을 낼 때까지도 자신의 전업을 포기하지 않은 슈퍼개미도 있습니다. 2004년 4억 원으로 시작한 주식투자가 불과 11년 만에 500억 원 이상으로 늘어났다는 투자 고수 김봉수 교수입니다.

59년생인 김봉수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 출신으로 UC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1984년 인제대 화학과 교수를 시작으로 경북대 화학교육학과를 거쳐 카이스트 화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이어왔습니다. 다만 나노과학 연구분야에서 나름의 성과를 내는 등 연구자로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김 교수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건 '주식 고수'라는 의외의 분야인데요.

김봉수 교수가 처음 주식판에 뛰어들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 동창을 만나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1984년 인제대에서 처음으로 화학과 교수를 하던 시절 김 교수는 의대 강의를 나갔다가 서강대 정외과를 다니다가 인제대 의대에 다시 입학한 동창을 만났습니다. 당시 자신은 교수이고 친구는 의대생이었지만 김 교수는 속으로 '20년쯤 뒤에 나는 여전히 교수로 고생할 텐데 저 친구는 의사가 돼 돈을 많이 벌고 있겠구나'싶었지요. 그런데 정말 20년 후 그 친구가 고급 외제차를 끌고 동창회에 나타나서 친구들을 데리고 강남의 비싼 술집에 간 것입니다.

이때 받은 충격이 가시기도 전 김 교수는 자녀들의 교육비 문제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걸 힘들어해서 외국인학교에 보내야 할 상황인데, 1년에 5천만 원 정도이던 당시 교수 연봉으로는 교육비 부담이 쉽지 않았던 것. 초등학교부터 고3까지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우리나라와 미국 최고 대학 학위를 받은 그는 '그런데 왜 내 통장 잔고가 이 모양이지'라는 자괴감이 들었고, 생각 끝에 김 교수는 2004년 주식판에 뛰어들었습니다.

주식투자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김 교수는 학창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가용자산을 현금화하고 주위에서 끌어오고, 대출까지 받아 만든 돈 4억 원을 들고 '실패하면 안된다'라는 마음으로 각종 정보를 검색했지요. 그리고 자주 언급되는 종목 100개를 선정해서 분석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투자에 실패하게 되는 패턴을 복기해서 어떤 오류가 있는지도 파악했습니다.

6개월간 주식 관련 책 200권을 읽은 김 교수는 자신의 분석을 바탕으로 대중이 간과하고 가치가 저평가된 주식을 찾아 투자했습니다. 덕분에 F&F, 삼광유리, 고려신용정보, 세진티에스, 동양에스텍, 부산방직 등 소형주 투자로 대박이 났고, 특히 6000원대에 사서 8만 원대에 판 것으로 알려진 아이에스동서 투자로 '슈퍼개미'의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지요.


주식 수익 100억 원을 목표로 한 김 교수는 수익이 100억 1원이 되는 날 학교에 사표를 내고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2014년 9월 10일 투자 수익이 100억 원이 넘고도 사표를 내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대해 김 교수는 "주식투자로 100억 원을 벌었는데 이상하게 주식가격이 계속 오르더라. 당황했다. 한 달 동안 고민했다. 난 아무것도 안 하는데 돈이라는 게 계속 늘어나는 거다. 무섭더라"면서 "월급쟁이로부터 탈출이라는 소박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100억 원이 넘으면서 돈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식시장이 화학보다 쉽다고 말하는 김 교수는 2017년 전업투자가로 변신했습니다. 그리고 교수일 때도 전업투자가로 변신해서도 꾸준히 강조하는 투자종목 선정의 기준은 '생활투자'입니다. 실제로 딸들 과외를 시키며 해당 교사들이 교수인 자신보다 낫더라고 느낀 김 교수는 메가스터디에 투자했고, 2007년에는 보험회사에서 보험료를 80% 인상한다는 전화가 와서 엄청 싸운 다음날 보험회사 주식을 샀습니다. 또 2009년에는 제네시스를 샀는데 너무 좋아서 현대자동차 납품업체에 투자하기도 했지요.


주식 고수들이 하나같이 강조하는 종목 선택의 공통 기준, 찾으셨나요? 찾았다면 이제 주식을 산 뒤 몇 년 간 푹 자야 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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