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 버린 몸이니 백년해로시키자" 성폭행범과 피해자를 결혼시킨 판사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 속 선녀의 입장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일면식도 없는 남자가 날개옷을 훔쳐 가는 바람에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게 된 선녀. 심지어 아이 셋을 낳아달라는 폭력적인 언행과 협박을 일삼는 그 범죄자와 살을 비비고 살아야 한다니 절망적인 상황이지요.

놀랍게도 남성우월주의와 잘못된 성관념으로부터 비롯된 '납치혼'의 방식이 현실에서도 벌어졌습니다. 최근 공중파의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불과 20여 년 전까지도 버젓이 신문에 실리던 황당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을 다루었는데요.


처녀는 70명 중 단 한 명

1955년 박인수 사건

1955년 27살의 한 남성이 재판대에 섰습니다. 대학 재학 중 해병대에서 헌병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박인수는 군 복무 당시 애인에게 차였고 이후 여성에 대한 복수심이었던지 일명 '처녀사냥'에 나섭니다. 1954년 4월부터 주로 해군장교 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 댄스홀에서 무려 70명 이상의 여성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가졌지요.

당시 박인수는 6.25에 참전한 덕분에 대위로 진급했으나 장교로 복무하던 중 부대를 무단이탈해 불명예제대한  상황이었는데요. 그럼에도 여성들을 꾀어낼 때는 스스로를 대위라고 신분을 속였고 그의 화술과 매너에 넘어간 여성들 대부분은 여대생이었으며 국회의원과 고위 관료의 딸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20대 해군 대위가 수많은 여성들을 희롱하고 다닌다"라는 정보고 검찰에 접수되면서 법정에 서게 된 박인수는 혼인빙자간음죄와 공무원 사칭 등의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는데요.

법정에서 박인수는 "나는 결혼을 약속한 적 없고 여자들이 제 발로 따라왔다. 댄스홀에서 함께 춤을 춘 후에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었으므로 구태여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빙자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많은 여대생은 대부분 처녀가 아니었으며 단지 미용사였던 한 여성만이 처녀였다"라고 주장했지요.

놀라운 것은 해당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과 언론의 태도입니다. 1심 법정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라며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피해 여성들에게 '문란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씌었습니다. 언론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박인수가 주장한 "한 명만 처녀였다"라는 말이 회자되면서 "순결의 확률은 70분의 1이다"라는 말이 유행했고, 신문에는 피해자 가운데 자살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를 담은 내용까지 버젓이 보도되었습니다. 이후 해당 사건은 항소심을 통해 유죄가 선고되어 1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지요.


기왕 버린 몸 결혼해라 판결

1973년 10대 남성 동급생 성폭행 사건

1973년에는 10대 남성이 동급생 여성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판사의 판결이 충격 그 자체입니다. 경북 김천의 17살 남학생이 동급생 여학생을 꾀어내 강제 성폭행하고 구속되었는데요. 당시 재판부는 1심에서 남성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으나, 2심 판사가 "그럴게 뭐 있느냐? 기왕 버린 몸이니 오히려 짝을 지어줘 백년해로 시키자"라고 발언한 것입니다.

실제로 해당 판사는 양가 부모를 설득해 법정에서 약혼까지 치르게 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고소해야만 처벌이 가능한 '친고죄'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이처럼 피해자 측과 합의가 되면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황당한 판결을 내린 판사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부모까지도 피해자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는 점인데요. 성폭행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 예상해볼 수 있는 부분이지요.


결혼으로 책임지겠다?

1998년 여고생 성폭행 사건

불과 20여 년 전에도 황당한 '강간중매'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23살의 포클레인 기사 김 모 씨는 밤늦게 비를 맞으며 택시를 기다리는 고등학교 2학년 여고생에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겠다"라며 차에 태운 뒤 외진 곳으로 데려가 성폭행했습니다. 그리고 범행 다음날 김 씨는 피해자를 또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가 피해자의 학교 교사로부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혀 구속 기소되었지요.

놀랍게도 피해자의 부모는 가해자인 김 씨 부모의 부탁으로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써줬습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외딴곳에 서 있는 여성을 차에 유인한 뒤 성폭행한 점으로 미뤄 계획적 범행으로 여겨지는 등 죄질이 나쁘다"라며 김 씨에게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이에 피해자의 부모는 항소심에서 "양쪽 부모가 두 사람을 성혼시키기로 했으니 선처를 바란다"라는 탄원서를 다시 써냈습니다. 이에 서울고법은 "김 씨의 부모와 피해자 부모가  '자녀가 자란 뒤 성혼시키자'라고 합의한 만큼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라며 3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해당 판결에서 피해 당사자인 여고생의 입장이 얼마나 반영되었는가 하는 점인데요. 이미 인생에서 엄청난 상처를 입은 피해자에게 부모와 재판부까지 나서서 2차 가해를 한 셈이지요.


56년 만에 재심신청

1964년 성폭행범 혀 절단 사건

1964년 18살이던 최 씨는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친구를 데려다주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가해자 노 모 씨를 마주쳤고 노 씨는 성폭행을 시도하며 최 씨를 넘어뜨리고 입을 맞추려 달려들었습니다. 이에 최 씨는 노 씨의 혀를 깨물어 1.5cm 가량 잘랐는데, 이로 인해 최 씨는 중상해죄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재판 과정에서 6개월간 옥살이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는 결혼을 요구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돈을 달라고 협박까지 했는데요. 검사 역시 최 씨를 조사하면서 "결혼하면 간단하지 않느냐", "못된 년, 가시나가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다"와 같은 말을 하면서 노 씨와 결혼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2차 가해는 법원에서도 이어져 판사는 최 씨에게 "처음부터 피고에게 호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 "피고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느냐"라는 등 황당한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법원은 최 씨에게 혀를 깨문 행위가 방위의 정도를 지나친 것이라며 유죄판결을 낸 반면 상대 남성인 노 씨에게는 강간 미수죄나 폭행죄를 적용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지 무려 56년 만에 사건의 억울한 피해자인 최 씨가 74세의 나이로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해당 사건의 판결은 과연 뒤집힐 수 있을까요?


영화로 만들어진 실화

1988년 주부 혀 절단 사건

56년 만에 용기를 내서 재심을 청구한 최 씨의 판결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판례가 있습니다. 바로 1988년 발생한 유사 사건인데요. 30대 주부 변 모 씨가 술을 마시고 새벽에 귀가하다 20대 남성 두 명에 의해 골목길로 끌려갔고, 그중 한 명이 변 씨를 넘어뜨리고 반항하는 변 씨의 옆구리를 차고 강제로 키스를 시도했습니다. 이에 변 씨가 남성의 혀를 깨물어 혀의 일부가 절단된 것이지요.

이후 혀를 잘린 남자의 가족이 변 씨를 고소했고 변 씨는 성폭행 혐의로 두 남성을 고소했습니다. 이에 1심 재판부는 변 씨의 행동이 정당방위가 아닌 과잉방어라며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는데요. 특히 재판 과정에서 가해 남성들은 "총각이 나이 든 유부녀에게 성적 충동을 느낄 리 없다"라거나 "변 씨가 자신을 유혹해 성관계를 하고 혀를 깨물어 상해를 입혔다"라는 등 억지 주장을 펼쳤습니다.

게다가 이혼 경력이 있는 변 씨에 대한 재판정과 대중들의 시선 역시 폭력적이어서 오히려 "강간 당해 마땅한 상황"이라는 식으로 몰고 가기도 했지요. 이후 해당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고 다행히 2심 판결에서는 변 씨의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발생 2년 뒤인 1990년 영화로 만들어져 한 번 더 주목받기도 했는데요. 미투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극작가 이윤택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작품 내용 자체는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영화 속에서 피해여성 역을 맡은 원미경 배우의 대사 "여자로서 이혼경력이 있어요. 술 마셨고, 새벽 1시에 돌아다녔고, 비틀거렸습니다. 그러면 강간당해도 되는 건가요?"라는 대사는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울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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