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아들이 이토 히로부미 손자와 의형제를 맺었다고?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00번째 3.1절을 맞아 나라를 위해 싸운 독립투사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회자되기도 하는데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독립투사의 친아들이 친일파였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반대로 매국노로 알려진 을사오적의 하나뿐인 손자는 독립투사가 되었다는데요. 같은 가족이지만 다른 길을 걸어간 역사적 인물을 TIKITAKA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안중근 아들, 친일파 되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중국 하얼빈역에서 민족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합니다. 이로 인해 1910년 2월 14일 일본은 안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연이어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일본은 안 의사의 유해조차 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의 유언대로 하얼빈 공원에 묻힐 경우 그곳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벌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안 의사의 집안에는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4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요. 독립 유공자 훈장을 탄 사람도 10명이 넘습니다. 실제로 안 의사의 동생인 정근은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내무 차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특히 정근의 딸인 미생은 백범 김구의 큰 아들 인과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또 안 의사의 막내 동생인 공근 또한 김구의 최측근이었는데요. 실제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선서를 하고 사진을 찍은 곳이 공근의 집이었습니다.

출처-위키백과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은 안 의사의 업적과 가문이 빛난 만큼 엄청난 탄압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실제로 안 의사의 가족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코르지포, 중국 길림성 무링현, 중국 상하이 등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는데요. 안 의사의 부인인 김아려 여사는 광복된 조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1946년 중국 상하이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또한 큰 아들 분도는 1911년 7살이 되던 해 사망했는데 일본의 밀정에게 독살됐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광복 후에도 안 의사 집안의 가난과 탄압은 이어져 왔는데요.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안 의사 집안은 김구 선생 계열에서 활동한 이유로 철저히 소외되고 박해받았습니다. 실제로 안 의사의 사촌동생인 경근씨과 민생씨는 박정희 정권에서 각각 7년과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민생씨는 투옥 중 중국에 있는 사촌 동생 경옥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는데,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의 피해는 여전하다.'라고 한탄했습니다.

출처-시사IN

안중근의 둘째 아들인 안준생 역시 중국 상하이 식당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며 힘겹게 생활했는데요. 1939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조선을 방문합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를 찾아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라는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린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는 '망부의 사죄는 보국의 정성으로 이토 공 영전에 고개 숙이다, 운명의 아들 안준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대서특필하기도 합니다. 이후에도 안준생은 일본 곳곳에서 공개 사죄를 계속하고 조선 총독인 미나미 지로의 양아들이 되어 그가 준 돈으로 약국을 차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와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고 하네요.

출처-뉴스프리존 출처-오마이뉴스

안준생의 이런 친일 행위에 백범 김구는 크게 분개하였는데요. 백범 일지에는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하지 않아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한편 최근 한 방송에서 이 화해극이 일본의 조작이었다는 주장이 나와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박문사에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모셔놓고 안준생을 부른 것인데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에 그를 죽인 안 의사의 위패를 모신 것 자체가 안준생을 부르기 위한 연극이었던 것이지요. 또한 천주교인이었던 안준생이 '네 아버지는 잘못했고 우리 아버지는 희생되었다. 전부 이 세상의 일이고 저세상 가서 평화롭게 지내시길 빈다.'라고 종교적 의미로 말한 것을 '우리 아버지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오역하여 대서특필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MBC '끝나지 않은 전쟁'

을사오적의 손자, 독립투사되다

박제순은 구한말 문관으로 젊은 시절부터 청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던 대한 제국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습니다. 특히 대한 제국에서 외무부 대신을 맡으며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요. 이완용과 함께 을사늑약에 서명한 을사오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07년 박제순은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지위를 받고 이후로도 꾸준히 친일 활동을 합니다. 따라서 59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까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출처-위키백과

박제순에게는 하나뿐인 손자 박승유가 있었습니다. 박승유는 1924년 태어나 친일파가 득세하던 시기에 을사오적의 자손으로 호사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할아버지에게 큰 실망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독립군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박승유는 1944년 10월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중국 저장성 부대에 배치되었는데요.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 제2지대로 입대하였습니다. 이후 중국의 무석, 무호, 남경 지방에 초모 공작활동으로 일본군을 괴롭혔으며 음악에 소질이 있다는 장점을 활용해 심리전 등에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박승유는 '할아버지는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라며 박씨 성을 거부하고 가명을 쓰며 활동했다고도 전해지는데요.

출처-서울신문

광복 이후에는 음악에 적성을 살려 성악가로 활동하며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후 교수로 지내게 됩니다. 1990년, 정부는 박승유의 공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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