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3개월 만에 대박냈던 가수, 9살 딸이 와이셔츠 빨아준다는 말에 눈물 흘린 사연은?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은 무척 상투적이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삶의 진리가 아닌가 싶은데요. 특히 연예계는 소위 '눈뜨고 나니 스타가 되어있더라'고 할만큼 빠른 시간에 대중적 인기를 얻은 스타가 있는 반면 톱스타로 불리다가 어느순간 사라진 비운의 스타들도 있습니다.

1990년 가요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이 가수 역시 데뷔 단 3개월 만에 역대급 히트곡을 지닌 가수가 되었는데요. 심지어 군대에 가서도 가요순위 프로그램의 1위를 달성했다는 전설적인 스타를 만나봅시다.

 
노래 홍보하기위해 군대갔다고?
역대급 히트곡 '입영열차 안에서'

1990년 가요계를 순식간에 정복한 주인공은 바로 김민우입니다. 김민우는 대원외고 출신으로 학창시절 윤종신과 함께 밴드활동을 하며 음악에 관심이 있긴했지만 대학졸업후 가정형편상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처지였는데요. 우연히 윤상, 김완선 등을 기획한 음반제작자 김광수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데뷔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2년 여의 준비기간을 지나 1990년 5월 김민우는 드디어 1집 앨범을 내놓게 되었는데요. 특히 '사랑일뿐이야'와 '입영열차 안에서'라는 두 곡이 동시에 인기를 얻으며 당시 최고의 가요순위프로그램인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데뷔 단 3개월만인 1990년 8월 김민우는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군입대를 하게 되는데요. 잘나가던 신인이 갑자기 입대를 결정한 것에 대해 '입영열차 안에서'라는 곡을 띄우기 위해 기획사에서 강제로 입영시켰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지요.

이에 대해 김민우는 영장을 받으면 바로 입대해야 하는 걸로 알아 입대한 것 뿐이라는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입대 후에도 김민우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고 결국 김민우는 군인신분으로 가요톱10에서 골든컵인 5주 연속 1위를 2번이나 차지해 어머니가 대리수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3개월만 활동하고 입대한 김민우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팬들은 군관계자들에게 '김민우를 군대에서 빼달라'라는 청원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요. 정작 김민우 본인은 군복무 중 군인 대상 프로그램인 '우정의 무대'에 출연했다가 영창에 가야했습니다. 당시 김민우가 8사단 출신인데 2사단 촬영장에 간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요. 군인들을 응원하는 좋은 마음으로 '입영열차 안에서'를 열창했지만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끌려가 영창에 일주일간 머물렀다고 하네요.

화재사고로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

김민우는 방위병으로 근무한 덕분에 군복무 중에도 2집 앨범을 준비해 내놓기도 했는데요. 다만 군인신분이라 활동을 하지 못했고 1992년 제대 후 3집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제개했습니다. 하지만 김민우가 활동을 쉬는 동안 이미 한국 가요계의 판도는 많이 바뀌어 있었는데요.

(왼)2집 앨범 (오)3집 앨범

바로 '서태지'라는 새로운 거물이 나타난 것이지요. 서태지가 만든 가요계의 새 트렌드는 댄스와 랩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는데요. 기존의 발라드를 고수한 김민우의 3집은 저조한 성적을 거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김민우는 재기를 노리며 자신의 전재산은 물론 대출까지 받아 투자해 녹음실을 마련하고 음악활동에 전념했는데요. 1996년 김민우의 녹음실과 같은 건물에 거주하던 세입자가 방화를 저지르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김민우의 녹음실까지 가스폭발사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신용불량자가 된 김민우는 집까지 차압당하며 밤무대 가수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는데요. 당시를 회상하며 김민우는 '지금 잠들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길 바랄 만큼 나락이었다. 종일 라이브 카페, 야간 업소 4~5곳을 돌아다니며 70~80곡을 불렀는데도 다 빚 갚는데 썼다. 단돈 만원이 없어서 친구 결혼식에 암사동에서 강남까지 걸어갔다.'라며 힘들었던 상황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가수 김민우 버리고
영업사원으로 밑바닥부터

결국 김민우는 1997년 4집을 마지막으로 가수 활동을 중단하고 아내와 딸을 위해 전업을 결심하게 되었는데요. 김민우가 새롭게 시작한 일은 바로 수입차 세일즈. 김민우는 가수로 활동한 인지도와 연예계 인맥을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가수로서의 김민우를 지워버렸습니다.

 


김민우는 영업 중 문전박대를 당해도 굴하지 않았고 '김민우 아니냐'라며 수근거리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고개를 숙였는데요. 올림픽대로에서 차가 막히면 내려서 뒤차 서너대의 상문을 두드리고 리플릿을 돌릴 만큼 열정적으로 영업에 임했습니다.

이후 김민우는 높은 판매기록을 달성하며 업계에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업사원들은 한달 평균 1.5~2대를 파는데 김민우는 한달에 8대 이상을 팔았습니다. 덕분에 영업을 시작한지 2년 만에 판매왕에 올랐고 2007년 빚을 모두 갚게 되었습니다.

신용불량자 신세를 면하고 새롭게 체크카드를 발급하던 날 김민우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했다고 하는데요.지난 2009년에는 자신의 성공담을 담은 책 '나는 희망을 세일즈한다'를 발간하며 지방의 한 대학에서 자동차딜러학과 전임 교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일주일만에 허망하게 보낸 아내
그리고 딸과의 새로운 시작

김민우는 아내와 딸을 위해 가수의 꿈도 포기하고 열심히 살아왔지만 빚을 갚고 바쁘게 살아가느라 정작 가족들과 여행 한번 갈 시간도 없었다고 하는데요. 2017년 드디어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들뜬 마음으로 여행 준비를 하던 때에 때아닌 시련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여행을 몇 주 앞둔 어느날 김민우의 아내는 목이 아프다며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는데요. 이후 피부과에서 처방받은 스테로이드로 호전되는가 하더니 증상과 통증이 심해졌고 결국 검사 끝에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이라는 희귀병을 진단받았습니다.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후군이란 간이나 림프절에서 세균 등을 없애는 역할을 하는 대식세포가 과다하게 증식해 조절되지 않는 혈구 탐식 증상을 초래하는 질환인데요. 건강한 정상세포까지 위협해 과도한 염증 상태가 나타난다고합니다. 김민우 아내의 경우 진단 당시 이미 뇌까지 전이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때문에 김민우의 아내는 입원한지 단 일주일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김민우는 이후 MBC '사람이 좋다'에 출연해 '아내의 중환자실에 매달려 있는 약물, 주사만 해도 20개였다. 의식이 없다고 해도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는데요. '그리울 땐 통화 녹음한 걸 들어볼 때도 있다. 주로 장 보는 얘기다. 내가 일이 힘들어도 지금껏 잘 올 수 있었던 건 든든한 동반자 아내 덕분이었다.'라며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아내가 떠난 후 김민우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건 어린 딸인데요. 당시 9살이던 딸은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아빠 나 세탁기 돌리는 거 배울게. 내가 아빠 와이셔츠 빨아줄게'라며 의젓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힘든 상황을 이해하고 너무 일찍 철이 든 딸에게 김민우는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인데요. 그는 인터뷰를 통해 '상처가 억지로 눌러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점점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제가 방송에 나올 때마다 아내와의 사별이 회자되겠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아내도 원할 것이고, 딸에게도 아빠가 중심을 잡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라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김민우는 최근 SBS '불타는 청춘'에 출연해 화제가 된 것을 계기로 가수활동 복귀를 게획하고 있기도 한데요. 현재 김태원의 도움을 받아 곡 작업을 하고 있다는 김민우는 그간의 아픔과 그 속에서 희망를 찾은 경험을 노래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김민우는 과거 군대에 가라고 제안한 매니저를 원망하고, 녹음실을 방화한 사람을 미워하고. 대중이 왜 내 음악을 알아주지 않을까 좌절하며 지냈다고 하는데요. 과거에 사로잡혀 남탓만 하는 자신을 버리고 바닥부터 새로 시작한 것이 시련을 극복하게 된 비결이라고 하네요. 역경을 딛고 일어선 김민우의 인생이야기처럼 그의 음악도 대중들에게 또한번 감동을 안길 수 있을지 기대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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