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라는 말은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참 허황된 말로 들립니다. 눈앞에 닥친 위기를 이겨내기도 빠듯한 상황에서 새로운 기회를 도모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을 해서는 성공할 수 없는 걸까요?
전 국민이 어려웠던 IMF 시기, 위기를 발판 삼아 새롭게 일어난 기업들이 눈에 띕니다. IMF 당시 20년간 일하던 조흥은행을 그만둔 40대 김용덕 씨는 커피사업에 뛰어들어 현재 전국에 10여 개 매장을 가지고 200억 원 이상 매출을 기록하는 테라로사의 대표가 되었고, 대우그룹 최연소 임원에서 외환위기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서정진 씨는 바이오산업에 뛰어들어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이어 주식부자 4위에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 이재용 부회장을 제치고 주식부자 2위에 오른 주인공 역시 IMF 시기 새로운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혈서 쓰면서 공부하던 장남
IMF 때 시작한 사업을 기반으로 국내 손꼽히는 주식부호가 된 주인공은 카카오 김범수 의장입니다. 1966년 2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 김 의장은 어린 시절 할머니를 포함해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 살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당시에 대해 김의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하고 같이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지방에 돈 벌러 다니신다고"라며 "모성애에 대한 트라우마, 그리고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라고 전했습니다.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듯 김의장은 그토록 가난한 집안에서 재수까지 하면서 형제들 중 유일하게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재수를 할 때는 혈서까지 쓰면서 독하게 공부했고, 담배를 끊기 위해 까치 담배 3개를 사다 책상에 올려놓고 진짜 힘들 때만 피자고 결심했는데 1년 후 2개비가 남아있을 정도였지요.
고스톱 당구 포커에 빠진 서울대생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들어간 후에도 당장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점심을 굶으면서 지냈고 당시에는 불법이었던 과외를 몰래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몰래바이트'로 번 첫 월급 15만 원으로 라면을 사 먹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김 의장은 의외로 방탕한(?)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재수시절 워낙 힘들었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에, '서울대 졸업하고 취직 못하진 않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더해져서 "도둑질 빼고는 다 해보자"싶었지요.
실제로 김 의장은 대학 1학년 시절 고스톱, 포커, 당구, 바둑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이후에도 '돈 되는 일'을 찾거나 '취업을 위한 커리어'에 집중하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을 찾아다녔는데요. 대학원 시절 PC 통신의 초기 형태인 BBS 사업 쪽으로 창업한 후배 사무실에 갔다가 온라인상에서 만나 채팅으로 대화하는 걸 보고 "이게 뭐야, 대체?"라는 호기심으로 3개월 동안 후배 사무실에 합숙하면서 배웠고, 졸업하고 컴퓨터를 원 없이 쓸 수 있는 회사에 취직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유니텔 만든 삼성맨
김 의장은 자신의 결심대로 컴퓨터를 원 없이 쓰는 삼성SDS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이 현재의 포트란과 코볼에 집중할 때 이를 건너뛰고 '다음은 뭐지?'라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윈도와 유니텔에 집중했지요. 이에 대해 김의장은 "길게도 필요 없다. 딱 6개월만 앞서 다르게 보고 질문을 던지면 웬만한 건 다 준비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6개월을 앞선 덕분에 김 의장이 주도적으로 개발한 삼성의 유니텔은 기존 텍스트 위주의 PC통신계에 클릭만으로 서비스가 가능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다만 유니텔이 천리안을 위협할 정도로 급성장하던 1998년 김 의장은 오히려 삼성SDS에 사표를 내고 창업에 도전했습니다. '내가 잘하는 게임을 온라인으로 옮기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방탕한 대학시절 밤새워 놀던 고스톱과 포커를 온라인으로 가져와 '한게임'을 만든 것이지요.
한양대 앞 PC방 사장님
하지만 IMF 직후였던 당시 김 의장은 자금난에 빠졌고, 그 해결책으로 PC방 창업에 나섰습니다. PC방 사업이 뜨기도 전인 당시 2억 4천만 원이라는 거금으로 한양대 앞 국내 최대 규모의 PC방 '미션넘버원'을 운영한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이 개발한 한게임을 설치하면 PC방 고객관리 프로그램을 무료로 주는 영업방식을 통해 사업 확장을 해냈는데요.
PC방 사업 자체가 초기였던 시절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PC방 관리 프로그램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점은 PC방 업주들에게 무척 반가운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전국 PC방의 컴퓨터 초기 화면에는 한게임이 깔렸습니다. 덕분에 한게임은 불과 1년 만에 1000만 회원을 달성했지요.
서울대 동기 네이버와 합병
수익모델은 없는데 사용자가 급격히 늘면서 한게임은 적자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삼성SDS 입사 동기이자 서울대 동기인 이해진이 만든 네이버는 100억 대 투자유치로 돈이 넘쳐나는 상황. 결국 2000년 트래픽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한게임과 수익모델이 부족했던 네이버가 합병을 결정해 NHN이 되었고, 2001년 게임 아이템 판매로 수익모델이 확고해진 NHN은 단번에 다음을 제치고 국내 포털업계 1위로 등극했습니다.
삼성을 떠나 PC방 사업으로 마련한 종잣돈을 이용해 창업에 성공하고 국내 최대 포털 NHN의 공동대표가 되었다면 사업가로서도 인생에서도 성공한 것 아닌가요? 이에 대한 김 의장의 답은 조금 달랐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게 성공이라 정의해버리고 달려온 것 같았다"라는 김 의장은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자신을 잘못된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고 생각했고 이해진 대표를 만나 "잘 모르겠다. 난 일단 가족들에게 가야겠다"라는 말을 남긴 채 2007년 8월 대표직을 사임했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한 채 가족이 있던 미국으로 떠난 김 의장은 아이들과 놀아주고 등하교를 도와주면서 1년을 보냈습니다. 이후 한국으로 먼저 들어와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던 김의장은 고1 아들과 중3이던 딸에게 "1년만 놀자"고 설득해서 휴학을 결정했고, 네 식구가 함께 여행도 가고 PC방에서 게임도 하면서 놀기만 했지요. 당시에 대해 김 의장은 "넷이 게임하다 보면 금세 새벽 4시였다. PC방 주인이 이상하게 생각하더라. 행복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카카오톡으로 대기업 총수되다
그렇게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또 미국에서 3년을 놀면서 김 의장은 아이폰 출시에 눈을 돌렸습니다. 웹이 아니라 모바일이 중심인 시대가 올 것을 내다본 것이지요. 그리고 2010년 '카카오아지트', '카카오톡', '카카오수다'를 연이어 내놓은 끝에 한국 앱스토어 소셜네트워크 1위를 차지한 '카카오톡'의 성공이 점쳐지자 다른 서비스는 중단하고 카카오톡에만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기존 모바일 메신저인 왓츠앱이나 M&Talk와 달리 무료인데다 한글지원이 되고 그룹채팅까지 가능한 카카오톡은 1년 만에 회원 수 10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후 다음의 '마이피플'이나 네이버의 '라인' 등이 PC버전과 연계한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역전의 기회를 노렸지만 이미 대한민국 모바일 사용자들은 '카카오톡'의 네트워크 안에 묶여서 이를 벗어날 수 없는 수준.
국내 모바일 메신저 시장을 점령한 김 의장은 국내 포털사업자 2위인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합병을 결정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앞서 네이버는 한게임과의 합병을 통해 다음을 넘어서 업계 1위로 등극한 바 있는데요. 김 의장이 친정이나 다름없는 네이버의 경쟁사인 다음과 손잡으면서 업계에는 또 한 번의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한게임 시절 네이버와의 합병으로 만든 NHN에서 대표직을 사임했던 것과 달리 김 의장은 2014년 다음과 카카오의 합병으로 만들어진 법인 다음카카오를 이듬해 '카카오'로 변경하고 기업의 중심에 섰습니다. 여전히 국내 포털 1위는 네이버이지만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시한 바에 따르면 카카오는 자산총액 10조 6천억 원으로 대기업으로 분류된데 반해 네이버는 자산총액 8조 3천억 원으로 준대기업에 머물렀지요.
이로 인해 김범수 의장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기업 총수에 등극했습니다. 6개월만 앞서가면 뭐든 된다는 김 의장이 앞으로 내놓을 '6개월 앞선 미래' 역시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