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와 여배우의 40년 동행 이야기

국내 약 50만 명의 환자가 투병 중인 알츠하이머는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이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과 주변인들의 생활 전반을 변화시키는 극적인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슬픈 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알츠하이머는 실제로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병인데요. 병으로 인해 40여 년의 세월을 동행해온 배우자와 헤어져야 한다면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첫눈에 반해
몽마르뜨 언덕에 자리 잡기까지

배우 윤정희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러브스토리는 꽤 유명합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영화계를 호령하던 톱배우 윤정희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세계적인 연주자인 백건우의 만남은 그 자체로서 화제가 될 만하지요.

두 사람은 지난 1972년 독일에서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갖게 되는데요. 당시 윤정희는 뮌헨 문화올림픽에 영화 '효녀 심청'의 여주인공으로 참석했다가 작곡가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이'의 관람을 위해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좌석을 찾지 못해 헤매던 윤정희는 공연장의 계단에 앉아 있던 한 한국청년에게 도움을 청했고 무사히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는데요.

윤정희의 표현에 따르면 '순수하게 생긴' 그 청년은 다름 아닌 피아니스트 백건우였고 두 사람은 오페라가 끝난 후 윤이상 작곡가의 소개로 식사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만남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첫눈에 윤정희에게 반한 백건우는 꽃 한 송이를 건네며 호감을 표시했는데요. 다만 윤정희가 한국에 돌아오면서 그날의 인연은 이어지지 못했지요.

그로부터 2년 후 파리로 유학을 떠난 윤정희는 자장면을 먹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 우연히 백건우와 재회하게 되었고 운명처럼 재회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는데요. "지붕 밑 방을 하나 얻어 같이 살자"라는 백건우의 남다른 프러포즈에 두 사람은 몽마르뜨 언덕에 낡은 집을 얻어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톱 여배우가 아닌 남편의 매니저가 되다

이후 1976년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진정한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윤정희는 한국에서 톱 여배우로 살던 삶을 접고 피아니스트 남편의 매니저를 자처하고 나섰는데요. 실제로 연주 투어를 다니느라 1년에 절반 이상을 이곳저곳 떠돌며 살아온 피아니스트 백건우 곁에는 늘 아내 윤정희가 있었지요.

이에 대해 윤정희는 "부부가 같이 다닌다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한 연주가가 연주에 집중하기 위해 필요한 뒷일은 참 복잡하다"면서 "본인이 할 수 없는 건 옆에서 다 해줘야 한다. 짐도 챙겨야 하고 정신적 여유를 주기 위해 곁은 지켜야 한다."라고 전했습니다.

더불어 "어릴 적부터 클래식을 좋아했기에 남편의 음악을 들음으로써 굉장히 큰 행복을 느낀다"라고 밝혔는데요. 지난 2010년 영화 '시'의 촬영 당시에도 남편과 함께 4번의 해외 공연을 갈 수 있도록 스케줄을 배려해달라는 특별한 조건을 달 정도였다고 하지요.


40년 동행

결혼 후 40년 동안 떨어져 지낸 적이 없다는 백건우와 윤정희는 최근 서로를 위해 떨어져 지내기로 결정했습니다. 10여 년 전 시작된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증상이 심각해지면서 딸의 옆집으로 옮겨 간호를 받기로 한 것인데요. 때문에 백건우는 아내 윤정희와 올 초 스페인에 연주 투어를 함께 간 것을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아내 없이 혼자 투어에 나서고 있습니다.

10년 전 알츠하이머 증상이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해도 백건우는 혼자서 아내를 돌보고자 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안될 거라고 말렸지만 아내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간호했는데요. 2010년 영화 '시' 촬영 당시에도 증상이 시작된 이후였지만 부부가 함께 노력한 덕분에 무사히 촬영을 끝냈지요.

다만 증상이 심해지면서 윤정희 본인이 매우 힘들어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전 세계를 옮겨 다니며 시차와 환경이 변하는 낯선 상황은 알츠하이머 환자인 윤정희에게 힘들 수밖에 없었는데요. 공연장으로 가면서 '우리가 왜 가고 있냐'라고 묻고 공연장에 도착해서는 '여기서 뭐 하는 거냐'라며 묻는 등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수십 번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식이었지요.

최근에는 증상이 심해져 밥 먹고 치우고 나면 다시 밥 먹자고 하는 정도까지 되었고 딸을 봐도 누군지 분간을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데요. 결국 백건우는 윤정희를 위해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프랑스에 있는 딸에게 윤정희의 간호를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알츠하이머도 막지 못한 그리움

윤정희의 간호를 맡고 있는 딸의 인터뷰에 따르면 윤정희는 알츠하이머 증상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편에 대한 애틋함을 간직하고 있는데요. 딸은 "요새도 물어본다. 아빠가 어디 갔는지 물어서 연주 여행 갔다 하면 함께 간다고 빨리 택시를 부르라고 한다"라고 전했습니다.

때문에 부부가 떨어져 지낸 초반에는 윤정희가 남편을 만나고 나면 불안감이 커지고 그리움을 호소해 안타까웠던 적도 있다고 하는데요. 다행히 최근에는 요양생활에 많이 적응해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하네요.

백건우는 요양 중인 아내에게 갈 때마다 발코니에 꽃이나 화분을 올려놓고 온다고 하는데요. 독일에서 만나 첫눈에 반했던 그 순간 말 대신 전했던 꽃 한 송이의 진심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 백건우는 내년 10월 슈만의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 최근 슈만에 빠져 지낸다고 하는데요. 슈만이 평생 사랑했던 아내 클라라가 슈만의 배우자이자 음악적 동반자였다는 점과 슈만이 정신적으로 힘들어 병원에서 요양하던 중 두 사람이 떨어져 지내야 했던 아픔을 생각한다면 백건우가 연주하는 슈만에는 더욱이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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