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중섭이 일본 재벌 딸과 결혼하고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

화가 이중섭은 우리에게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 속 황소 그림으로 익숙한데요. 실제로 이중섭의 작품 '소'는 2007년 경매에서 47억 원에 낙찰되어 국내 작가의 작품 중 김환기 작품 다음으로 비싼 그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중섭은 살아있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는데요. 한국의 반 고흐라고 불릴 만큼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이중섭과 그의 아내 마사코의 절절한 사랑을 TIKITAKA와 함께 만나봅시다.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요.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시절에 일본으로 미술 유학까지 갈 정도였지요. 20살에 일본 분카가쿠잉으로 유학을 간 이중섭은 그곳에서 2년 후배인 마사코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당시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일제강점 말기로 일본 여성과 사랑을 이루기는 어려웠지요. 때문에 이중섭은 마사코를 두고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는데요. 

결코 이중섭을 잊을 수 없었던 마사코는 1945년 4월 전쟁 막바지 교통 편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임시 연락선을 타고 조선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마사코는 일본 재벌 이츠이재단 임원의 딸이었지만 이중섭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자신의 배경을 버리고  먼 길을 온 것이지요. 천신만고 끝에 만난 이중섭과 마사코는 1945년 5월 결혼식을 올렸는데요.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만난 덕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꿈같은 신혼생활을 보냈고 조국도 해방되었지만 곧 그 행복은 깨어졌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진 것인데요. 대부분의 한반도 사람들이 겪어야 했듯이 이중섭 가족도 부산으로 피란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중섭이 피란민 조사를 받던 중 아내가 일본여자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면서 신분을 의심받게 되고 피란민들에게 핍박을 받기도 한 것이지요. 때문에 이중섭 가족은 힘든 피란생활 중에도 뜨내기 생활까지 해야만 했는데요. 피란생활 1년 6개월 동안 부산과 제주를 거쳐 다시 부산으로 옮기며 생활했습니다. 그 과정에 이남덕은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했고 두 아이는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힘겨웠습니다.

길 떠나는 가족, 1954

시간이 지난 후 이중섭과 이남덕은 피란생활을 하던 이 시절을 자신들이 가장 행복한 때로 꼽았는데요. 너무 가난해서 바닷가에 조개를 주워 연명해야 할 정도였지만 가족이 모두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이 이어져 아이들의 건강까지 상하자 이남덕은 하는 수없이 1952년 7월 귀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잠시 돌아가 있기로 결정했는데요. '잠시'로 계획했던 가족의 이별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헤어짐이 되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보낸 후 이중섭은 혼자서 가난과 맞서 싸우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는데요. 

가족과 비둘기, 1956

이중섭은 전쟁 직후 척박한 상황을 이겨낼 만큼 강하거나 억척스럽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림을 빨리 그려서 많이 팔아 보고 싶은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요. 캔버스나 스케치북 살 돈이 없어 합판이나 맨 종이, 심지어 담뱃갑 은지에도 그림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어 연필이나 못으로도 그렸다고 합니다. 

담뱃갑 은지에 그린 그림

이중섭의 대표작인 '흰 소' 역시 이 시기인 1954년 그려졌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그림 속에 뼈밖에 남지 않은 소는 강렬한 눈빛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합니다. 마치 전쟁으로 피폐해진 우리 민족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는 듯이 말입니다. 

흰 소, 1954

이중섭은 남의 집 소를 뚫어지게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을 정도로 소를  자주 그렸는데요. 이중섭에게 소는 한국적 서정과 향토색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소재였습니다. 덕분에 그의 작품에는 한국적 아름다움과 정서가 듬뿍 담겨있지요. 

황소

이중섭의 작품 가운데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편지입니다. 이남덕과 아이들이 일본으로 떠난 후 편지는 이중섭을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끈이었는데요. 글 없이 그림으로만 전한 엽서만 해도 1백여 점이 되고 진심 어린 손글씨로 써 내려간 편지 역시 상당량입니다. 그 내용은 또 얼마나 절절한지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오늘로 1년째가 됩니다. 1년 또 1년, 이렇게 헤어져서 긴 세월을 보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함께 있지 않아선 안 되오. 당신과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얼마나 마음이 들떠 있는가를 생각해 보구려. 힘을 내주시오. 꼭 확실한 성과를 거두도록 하시오. 답장 기다리오. (1954년 여름 편지 中)

추위에도 지지 않고 굴하지 않고, 어두운 새벽부터 일어나 전등을 켜고 제작을 계속하고 있소.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여! 마음속으로부터 기쁘게 서둘러 편지를 정리해주시오. 하루라도 빨리 함께 살고 싶소. 세상에 나만큼 자신의 아내를 광적으로 그리워하는 남자가 또 있겠소. 만나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또 만나고 싶어서 머리가 멍해져버린다오. (1954년 11월 편지 中)


특히 그의 편지에는 유독 '뽀뽀'라는 단어만 한국어 발음으로 쓰여 있어 애틋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기도 한데요.

지금 나는 당신을 얼마만큼 정신없이 사랑하고 있는가, 어떻게 글로 쓰면 나의 마음을 당신의 마음에 전할 수가 있을까. 내가 얼마나 훌륭한 그림을 그려야만 내 마음을 전할 수가 있을까요. 나의 귀엽고 너무나도 귀여운 선생님. 제발 가르쳐주시오. 그대들만 곁에 있다면 척척 그려내겠소. 자신만만이오.

이중섭의 노력과 달리 그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고 그는 거식증과 조현병으로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1956년 7월 간염으로 입원했다가 그해 9월 쓸쓸히 숨을 거두었는데요. 무연고자로 신고되어 있는 바람에 3일 후 뒤늦게 친구들이 방문하기 전까지 안치실에 방치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춤추는 가족

한편 최근에는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쓴 편지 중 최초로 한글로 된 편지가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이 편지는 결혼 전인 1940년 이중섭이 연필로 써서 전한 짧은 편지로 마사코에게 쓴 편지 가운데는 유일하게 한글로 쓴 것입니다.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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