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웹툰, 웹소설 등이 지키고 있는 자리는 90년대 PC통신 문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에는 한국형 판타지를 내세운 연재소설들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당시, PC통신은 아마추어 작가들이 자신의 글을 공개할 수 있는 획기적이면서도 파격적인 공간이었죠. 오로지 독자들의 선택에 따라 연재를 이어가기도 하고 조용히 사라지기도 한 수많은 작품들이 있었는데요. 그중 판타지소설 '칠성전기'라는 작품은 많은 독자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연재가 중단되었습니다.
판타지소설 마니아들 사이에서 "미완결이라는 점이 유일한 단점이다"라고 극찬을 받고 있는 '칠성전기'를 쓴 작가는 아이디 '마늘맨'으로 연재하던 정하늘 작가입니다. 10년 넘게 '연재중단'된 상황에도 많은 팬들은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완결을 기다려왔는데요. 몇 년 전 마늘맨의 실제 근황이 알려지면서 팬들 스스로가 "마늘맨을 놓아주자"라고 다짐했다고, 팬들이 20년 만에 마늘맨을 놓아준 사연은 무엇일까?
마늘맨의 근황이 전해진 건 지난 2019년 4월 일본 후쿠시마 주변산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를 둘러싼 한일 간 무역분쟁 뉴스를 통해서입니다. 당시 WTO는 일본이 "한국의 일본산 수산물 식품 수입 규제는 부당하다"며 제소한 사건의 최종심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한국 손을 들어줬습니다. WTO 위생 및 식품위생 협정관련 분쟁 가운데 피소국이 이긴 사례는 처음이라 '기적'이라는 평가를 들었죠. 이때 1심을 뒤집고 기적적인 승소를 이끌어낸 주인공이 바로 마늘맨 정하늘 씨였던 것. 그는 산업통상자원부 통산분쟁대응과장의 역할로 나서서 우리 정부의 승소를 이끌어냈습니다.
앞서 2013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오염수가 방출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우리 정부는 후쿠시마를 포함한 일본 내 8개 현에서 잡힌 수산물 수입을 금지하고, 모든 일본산 식품에서 미량의 세슘이라도 검출될 경우 추가 핵종에 대한 검사 증명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는데요. 이에 일본이 "부당하다"며 WTO에 우리 측을 제소했습니다. 이후 1심에서 패소한 우리 정부는 2심을 준비하던 2018년 4월 공모를 통해서 경력개방형 외부전문가를 확보했습니다.
정하늘 과장 역시 당시 공모를 통해 산업부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미국 뉴욕주립대 철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일리노이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정하늘 과장은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대형로펌 '세종'에 소속되어 일하면서 소위 '스타변호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국제'라는 단어가 들어간 모든 사건을 경험했다는 정하늘 과장은 통상분야에서 일인자로 꼽히는 능력자였습니다. 2016년 세계적 법률시장 평가기관인 체임버스앤파트너스로부터 '떠오르는 변호사'로 선정되기도 했죠.
이에 대해 정하늘 과장은 지난 5월 '로톡뉴스'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통상변호사로 정의한다"면서 "2017년 도널드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범람하고 통상분쟁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통상환경의 격변기를 최전선에서 겪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공직을 선택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통상 분야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hip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는데요. "무력이나 경제보복 같은 일방조치 대신 WTO체제 아래 사법절차를 통해 국가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매력적"이라는 것.
평소 취미로 이종격투기를 즐긴다는 정 과장은 본인이 선택해서 들어선 무역전쟁 최전선에서 승부사다운 기질을 선보였습니다. WTO 한일전 당시에도 제네바 호텔에 워룸(War Room)을 차려놓고 3주간 밤샘작업을 하는 모습에 동료들이 뜯어말릴 정도였는데, 결국 눈에 갑자기 종양이 생겨 급하게 귀국해 제거수술을 받는 일까지 있었다고. 이에 실무팀 관계자들은 정 과장에 대해 "불도저 같다", "파이터의 면모다"라고 전했습니다. 특히 "민간에 있을 때보다 월급이 최소 절반은 깎였을 것"이라며 "함께 일해보니 사명감이 대단하다"라는 칭찬은 무척 현실적인 발언이었죠.
수입이 절반 이상 줄어드는 걸 감수하고 '스타변호사'의 자리를 내려놓은 정하늘 과장은 국가대표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이에 정부는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보답했습니다. 산업부에 들어온 지 2년 반만인 지난해 12월 3급 부이사관으로 승진한 것. 보통 공무원들이 서기관에서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는 데는 통상 14~15년가량 걸리는데 정 과장은 공직 성과를 인정받아 파격적인 승진의 주인공이 된 것이죠.
이에 대해 정하늘 과장은 "특별한 성과를 냈다기보다 인사혁신처에서 외부 인재 문호를 확대하기 위해 승진체계를 개선했는데 운 좋게 첫 대상자가 된 것 같다"면서도 "산업부에 있는 대다수의 공직자들이 정말 열심히 일하고 중요한 성과를 내고 있다"라고 자부했습니다. 실제로 정하늘 과장은 올해 초에도 사상 최대 규모의 WTO 분쟁에서 미국을 상대로 승소를 이끌어냈습니다. 미국이 AFA라는 제도를 이용해 자의적으로 고율 관세를 산정한 데 대해 2018년 우리 정부가 WTO에 제소했는데, 한국 돈으로 약 1조 7천억 원에 달하는 해당 수출 분쟁에서 정 과장이 최종 승소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한편 정하늘 과장은 '로톡뉴스'와의 인터뷰 말미에 '칠성전기'의 작가가 맞다고 직접 인정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쓴 글을 아직까지도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송구하다"면서 90년대 중반에 연재를 시작해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재연재하던 그 시절, "글쓰기는 삶에서 제일 큰 낙이었다"라고 회상했지요. 다만 40대가 된 지금은 20대 초반에 가졌던 생각이나 감성이 남아있지 않아서 칠성전기를 마무리하기는 힘들 듯하고 대신 나중에 "우리 세대에 맞는 글을 써서 보온하고 싶다는 생각"이라고 전했습니다.
PC통신 시절 판타지소설을 쓰던 작가에서 이종격투기를 즐기는 스타변호사로, 또 군 복무 시절에는 아프리카 소말리아에 파견된 청해부다 2진으로 가서 사령관 법무참모로 일한 경력까지, 정하늘 과장은 출중한 실력만큼이나 다양하고 이색적인 경력으로도 화제가 되었는데요. 어쩐지 본인이 쓰던 판타지소설 속 주인공 발카이드가 펼치던 화려한 전투장면이 UFC 링 위에서, 소말리아 파견지역에서, 무역전쟁에서 늘 승리를 이끌어내는 정하늘 과장의 실제 모습과 닮은 듯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