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이 되면 외투, 가방, 우산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임원이 되는 순간, 비서가 생기고 차량이 지급되기 때문인데요. 연봉 역시 부장 시절에 비해 2배 이상으로 뛰는 것이 정설. 하지만 연봉과 혜택이 늘어나는 만큼 회사에서는 그만큼 많은 성과를 원합니다. 자신이 이끄는 부서의 공과가 모두 임원의 책임이 되는 것.
게다가 임원은 '계약직' 신분으로 보통 1년마다 재계약합니다. 성과에 따라 재계약 여부가 정해지는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기에 임원이 '임시직원'의 줄임말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 실제로 2010년경 조사한 '국내 100대 기업 퇴직 임원 현황 분석'을 보면 임원 승진 1년 만에 17.35%가 퇴직하고, 15.48%는 2년 만에 퇴직했습니다.
임원이 되기까지 회사에서 얼마나 열정을 쏟아부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인데요. 수십 년간 몸담은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결별 통보를 받는다면 이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겠지요. 결국 30년간 일한 회사에서 잘린 아버지는 더 이상 한국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기 힘들다며 이민을 결심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너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
대기업 임원을 지내던 아버지가 생각지 못한 순간 실직한 후, 급작스럽게 이민을 결심하는 바람에 단 며칠 만에 다니던 학교까지 정리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났다는 고등학생은 가수 박재정입니다. 데뷔 초 금수저의 오해를 받기도 한 박재정은 실제로 할아버지가 유명 아이스크림을 만든 회사의 창립멤버인데요.
이에 대해 박재정은 할아버지가 관련된 회사가 '삼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롯데삼강보다 전인 1950~60년대 이야기"라며 "쇼팅, 사카린 등도 할아버지 회사에서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회사 창립멤버"라고 인정했습니다.
삼강은 국내 최초 대량생산 아이스크림 '삼강하드'를 출시한 기업으로 롯데삼강의 뿌리로 불립니다. 1950년대만 해도 아이스크림의 대량생산이 불가능해서 소상인들이 설탕이나 사카린을 넣은 단물에 적당히 색소를 넣어 얼려 만든 아이스케키를 만들어 팔았는데, 삼강산업은 1962년 식품위생법이 시행되면서 최신 설비를 갖춘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생산한 최초의 아이스크림 '삼강하드'를 내놓은 기업입니다.
다만 삼강은 1958년 일동산업으로 시작해서 제일유지화학, 삼강유지화학, 삼정산업, 삼강산업 등 수차례 상호명을 바꾸는 동안 공동설립자들 사이 경영권과 지분 문제가 많았고 결국 1977년 롯데그룹에 인수되면서 롯데삼강이 되었습니다. 아마 박재정의 할아버지 역시 일동산업의 창립멤버로 삼강산업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다가 롯데그룹에 회사를 넘기면서 오너 자리에서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사립초 출신이라는 금수저
한 기업의 창립자이자 오너로서 평생을 바쳐 사업을 일구기 위해 노력을 다한 박재정의 할아버지는 자식과 손자에게만큼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라"라고 말했습니다. 박재정의 아버지 역시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입학부터 대기업 임원이 될 때까지 자수성가했는데요. 집안이나 부모의 부를 물려주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박재정 역시 유년기와 학창 시절 자연스럽게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박재정이 졸업한 우촌초등학교는 성북구에 위치한 사립초로 교육열이 높은 학부모들 사이 큰 인기를 끄는 곳입니다. 영어교육을 중점으로 하며 요리, 미술, 체육 등 특기교육의 운영도 체계적인 편인데요. 다만 2019년 기준 입학금은 100만 원, 수업료는 분기별 206만 원으로 서울에서 가장 비싼 학교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이민 가서 사기까지 당했지만
소중한 시간
"초등학교 때까지는 되게 잘 살았다"라고 인정한 박재정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아버지의 실직 때문입니다. 대기업 임원으로 일하던 박재정의 아버지는 30년 동안 몸담은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실직한 후 큰 충격을 받으면서 이민을 결정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재정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떠나느라 다니던 학교도 정리하지 못한 상황이었는데요. 영어로 소통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더 박재정은 이민 당시 언어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동시에 워낙 조용한 시골 동네인 올랜도 지역에 머무르는 바람에 지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게다가 올랜도 지역에서 난 농사를 지으면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한 박재정의 부모님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금전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앞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지내던 박재정의 가족들은 처음 겪는 상황에 무척 힘겨울 수밖에 없었는데요. 오히려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가족 간 대화가 늘면서 돈이나 환경이 아닌 가족애를 키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고.
당시에 대해 박재정은 "2013년 슈퍼스타K 출연을 위해 미국을 떠나기까지 1년 4개월 동안 미국 생활은 순수함을 키운 시기였다"면서 "휴대폰 보는 시간보다 가족 간 대화가 늘면서 부모와 친구가 되었고 현지에서 만난 순박한 중남미 출신 이민자들과 어울리며 마음속에 순수함을 키웠다"라고 회상했습니다.
5억 상금 OO 위해서 다 썼다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이민 결정에 대해 크게 반대하고 사이가 멀어졌던 박재정은 미국 시골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아버지의 힘들었던 한국생활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라"라고 남긴 말을 실행에 옮기고자 슈퍼스타K5의 뉴욕 예선에 참가했지요.
힘든 시기에 음악으로 위로받으면서 "나도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다"라는 목표로 음악을 시작했다는 박재정은 당시 한국 나이 19살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묵직한 중저음과 호소력 짙은 감성으로 심사위원과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고, 우승까지 거머쥐었습니다.
오디션 도중 박재정은 "우승 상금으로 집을 사고 싶다. 저희 가족은 이사를 많이 다녔지 자리를 잡고 살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면서 "노래로 우승을 해서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살고 싶다"라는 소망을 전한 바 있는데요. 실제로 박재정은 오디션 우승 상금 5억 원으로 부모님의 금전적 위기를 해결해 드렸고 남은 돈으로 월세 보증금과 식당을 사서 온 가족이 한국에서 다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가수로서의 슬럼프와 활동 정체기를 겪으면서 쉽지 않았던 시간에도 박재정을 위로한 건 부모님과 남동생의 든든한 지원. 가족들의 응원으로 데뷔 후 8년을 잘 버텨온 박재정은 최근 MSG 워너비 활동으로 주목받으며 자신만의 밴드를 꾸려 본격 음악 활동에 나섰는데요. 음악과 축구 외에는 모든 면에서 아낀다는 박재정이 마음껏 투자하고 재능을 발휘한 음악적 결과물이 하루빨리 대중과 만나기를 기대해 봅니다.